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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느끼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 사이에 큰 괴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죄악 가운데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을 때에는 말할 것도 없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하려고 하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하나님의 생각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다. 하나님의 의와 나의 의가 다른 것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여지없이 무너뜨리시는 순간이 있다. 물론 크리스천이 성경의 원리에 근거한 원칙을 가지고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 원칙이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데 방해 요소로 작용하는 순간이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날마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하나님의 나를 향한 오늘의 계획에 맞추어 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마치 어제 기타줄을 튜닝했을지라도 오늘 기타 연주를 하기 전에 다시 한 번 튜닝해야 하는 이유와 마찬가지이다. 사격 전에 영점 조정을 늘 다시 해야 한다. 특히 쏘는 사람이 달라지면 총의 영점 조정은 새로 되어야 한다. 오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어제의 그것과는 달리 새로울 수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변하시지 않고 그 분의 말씀은 영구 불변하다. 그러나 그 말씀과 계획을 오늘 나를 이끌어 가시는 것으로 내가 받고 이해하고 적용함에 있어서 내가 바뀌고 상황이 바뀜에 따라 적용점과 강조점이 바뀔 수 있다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그 분이 지체로 부르신 우리들은 너무나 다양한 존재들이다. 이 존재들이 하나로 묶여 다양성 가운데 연합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다.

절대음에 맞추어서 나의 원칙이라고 하는 기타줄이 새로이 튜닝되어야 하는 것이다.

날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말씀하심에 대해 다시 듣고 다시 반응하는 섬세함과 부드러움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유대인 율법 학자들은 이 주님의 뜻을 율법이라는 틀로 화석화했다. 따라서 그들의 눈에 예수님의 행위는 이단처럼 보였다.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고 성전의 신성함을 무시하는 듯한 말씀에 대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자칫하면 열심있는 크리스천이 이러한 함정에 빠지기 쉽다. 특별히 한국 교회는 유교적 열심의 바탕 위에 세워지면서 원칙과 윤리성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교리 논쟁이나 정통성 주장이 주님의 뜻을 구하는 유연성보다 더 강조되곤 했다.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였고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의라고 여겨졌다. 이러한 성향은 장점도 있었지만 그만큼 단점으로 작용할 여지도 많았다.

하나님의 뜻은 때로는 우리가 세워놓은 윤리 기준과 충돌할 때도 있다. 한 예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기 자식을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은 인륜적인 측면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더구나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아브라함의 평생 하나님과 동행함과 순종의 결과로써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을 보여주는 증표였다. 아브라함의 사명의 결정체이기도 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삭을 잘 키워내는 것이 주님의 사명을 이루는 행위라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이라고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평생의 사명과 열심, 소망 이 모든 것들을 주님의 뜻 가운데 순복할 수 있느냐는 시험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각자 각자에게 다른 소명을 주시고 다른 방식으로 인도해 가시는 것을 경험한다.

그 때문에 성경을 읽다보면 상충되는 것 같이 느껴지는 구절들을 만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어떤 때는 아버지의 장례 때문에 머뭇거리는 제자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고 따라오라고 하신다. 또 따르겠다고 하는 어떤 무리에게는 따라오지 말 것을 종용하신다. 개인의 상황과 여건과 부르심의 방식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신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때로는 원칙에 확고한 나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고 당혹시키기도 한다. 그 때마다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 사이에 큰 간격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얼마 전 집에서 기도회를 하는 중에 내 머리 속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함"이라는 주제가 떠올랐다. 그러면서 책의 한 챕터가 머리 속에서 줄기차게 정리되는 경험이 있었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더 내려놓음 책을 끝으로 더 이상 기독 서적을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주변에서 다음 책은 "다 내려놓음"이 될 것이라고 농담삼아 이야기했을 때 나는 조용히 웃어넘겼다.

지난 번 더 내려놓음 책을 쓰면서 한 부를 하나님의 음성듣기로 해서 쓴 부분이 있었는데 책 편집 과정에서 책이 두꺼워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한 부 전체를 삭제했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 후에 책으로 내자는 출판사의 의견이 있었지만 아주 먼 훗 날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런 쪽으로는 자질이 없고 경험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기독 서적에 대해서 독서량이 매우 부족한 사람이다. 신앙의 양서를 읽을 기회가 그리 많이 주어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내가 추구하는 것과 필립 얀시의 영성을 비교해달라고 했들 때 미안하게도 나는 필립 얀시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것 한 권 없었다.
어떤 사람은 예수 전도단과 내가 추구하는 영성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보았는데 예수 전도단 리더들의 글을 읽기 시작한 것도 선교지에 오고 나서부터였다.

내려놓음 시리즈 출판과 함께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인물로 떠오르게 되면서 나는 답답했다. 내게는 글재주도 글을 잘 쓸 훈련의 경험도 없고 나는 신학적인 훈련도 받지 않았기에 더 이상 글을 쓸 여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많은 독자들이 홈페이지 게시판이나 이메일을 통해서 질문하는 내용이 대부분 어떻게 하나님 뜻을 분별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의도적으로 그 질문에 대해서 회피했다. 각자가 응답받는 방법이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경험을 일반화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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