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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교회 이야기 1

지난 달에 이란에 출장 다녀올 일이 있었다. 이 기회에 이란의 교회를 방문하고 역사 유적을 살펴보고 사역 현황을 확인해 볼 기회가 있었다.  이란은 성서의 중심무대의 하나였다.
이스라엘 민족을 바벨론 포로 시기로부터 해방시켜준 고레스 왕, 느헤미야를 유대 땅으로 돌려보낸 아닥사스다 왕, 에스더를 왕비로 택한 아하수에로 왕은 이란 지역의 군주였다. 이란에는 현재 하마단이라는 도시에 있는 유대인 마을을 끼고 다니엘의 묘, 에스더의 묘로 유대인들이 추정하고 있는 장소도 존재한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가장 먼저 알고 축하한 마기(동방박사)들은 바로 이란이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점성술사들이었다. 이미 오순절 사건 이래로 당시 바사인(페르시아인), 메대인 등의 이름으로 불리우던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두 사람 즉 시몬과 유다가 이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의 미움을 받아 순교했다고 한다.  이란은 이미 기독교 초기부터 복음이 들어간 지역의 하나였다.
이란 지역에 사산 왕조가 들어서면서 사산 왕조가 동로마 제국과 전쟁하는 과정에서 기독교도들이 스파이로 간주되어 박해받으면서 수많은 순교자를 내게 된다. 아울러 초기에는 조로아스터교로부터 탄압을 받았고 이슬람 정복 이후에는 이슬람교에 의해 전도가 금지되었다. 후대로 가면서 이슬람의 원리 주의가 발현하게 되면서 교회가 무력화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란 지역은 거의 천여년 동안 동방 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감당했다. 그리고 이란 지역에서부터 수많은 선교사들이 중앙아시아와 몽골 초원, 중국 그리고 그 동쪽 지역으로 나아갔다.  

현재 이란에는 공식적으로 허용된 소수의 교회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교회가 아르메니안 교회와 앗시리안 교회이다. 그 외에는 독일인 교회를 비롯해서 대부분 외국인들이 출석하는 교회가 몇 곳 존재한다. 한인 교회도 한 곳 있는데 이만석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다가 무슬림 선교에 관여하셨다는 이유로 추방되시고 그 후임으로 온누리 교회에서 파송하신 목사님이 섬기고 계시다.
이란에는 현재 공식 교회 외에 지하교회가 있다. 비공식적인 추정에 불과하지만 최대 10만여명의 교인들이 비공식적으로 예배 모임을 가지며 양육받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무슬림이었다가 개종한 사람들이다.  
많은 수가 꿈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거나 특별한 기적을 체험하고 나서 교회로 나온 경우이다. 또는 위성 방송 중 기독교 채널을 접하고 복음을 받아들인 경우도 있다.
결국 선교사가 교회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들을 모으고 계심을 보게 된다. 이란의 복음화 과정을 보면 선교는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인이 된 아르메니아인이나 앗시리아인의 경우는 문제가 그래도 적지만 무슬림이 기독교인이 될 경우 엄청난 박해가 그들을 기다린다. 나는 이란에 있는 동안 그곳에 있는 70여년 전통의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서 예배드린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예배하는 중 내내 하나님께서는 내게 눈물을 주셨다. 갈증이 날 정도로 눈물을 쏟아냈다. 그 때 하나님의 이 공동체를 향한 보호하심이 느껴졌다. 이것이 이란의 교회가 아직도 고통 가운데서 명맥을 유지하게 한 실체였음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는 페르시아가 역사적으로 수많은 보물을 자랑해 왔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가장 큰 보석은 바로 이곳에서 박해를 이겨내는 기독 공동체라는 마음을 주셨다.

내 눈물을 보고 내게 말을 건 이란인 형제가 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이 공동체를 향한 보호하심과 애정에 대해서 느낀 것을 그와 나누었다. 그는 나를 교회의 삼층에 있는 자료실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하이크 홉세피언 목사님의 영정이 걸려있었다. 이 교회에서 시무하시다가 순교하신 분이었다. 그 분은 대외적으로 잘 알려진 이란 교계의 리더였고 프로테스탄트 교역자 연합회 총회장으로 계셨다. 그 분의 순교와 관련해서는 이미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어 있다.
그 형제는 나를 저녁 식사에 초청했다. 나는 그 형제를 비롯해서 몇몇 교우들과 교제했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한 이란인 형제가 말했다. “당신이 우리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보호하심에 대해서 하루만에 고백할 수 있다니 놀랍네요. 내가 삶으로 느끼고 고백하기에는 십수년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이어서 이란 이라크 전쟁 당시 적의 미사일이 교회 옆 건물로 떨어졌던 일을 설명했다.
“그 때 미사일이 지붕을 뚫고 사람들이 식사하던 테이블 위로 떨어졌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기겁하며 놀랐는데 감사하게도 미사일은 불발탄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교회는 안전할 수 있었지요.”

이러한 수많은 기적을 거쳐서 교회가 명맥을 유지한 것이다. 결국 이란의 교회 역사는 순교의 피와 주님의 보호하심이라는 씨줄과 날줄로 이루어진 카페트라는 생각을 했다.
그 형제는 미국에서 복음을 받은 무슬림 개종자였다. 신분의 위협을 느껴서 미국 망명을 가야하는지를 놓고 기도하는 중인데 하나님의 뜻을 찾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명목적으로라도 무슬림이라는 공언을 하면 사업과 유산 모두를 물려주겠다는 아버지의 요청을 거절했다.  현재 번역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란에는 박해를 통해 자라가는 공동체가 있다.

몽골이 개방 이후 열려진 정치적 사회적 환경 때문에 기독교인이 증가 추세에 있다. 하지만 문제는 박해를 경험하지 않은 공동체이기 때문에 아주 가벼운 유혹에도 신앙의 양심을 저버리는 경우를 많이 본다. 참 믿음이 좋은 것 같이 봤는데 돈 때문에 남녀 관계 문제 때문에 쓰러지는 신앙인들을 많이 본다.
복음이 그들에게 삶에서의 유혹거리보다 크지 않은 것이다. 진실한 신앙을 찾기가 비교적 힘든 몽골 상황과는 달리 이란에서는 처음부터 목숨과 삶에서의 풍요로움을 포기하는 신앙인들이 나오고 있다.

이란의 근대 역사와 터키의 근대 역사를 비교하는 것은 중동 역사 학자들의 주요 관심 중 하나이다.  마찬가지로 이란의 선교는 터키 선교와 여러 면에서 비교 대상이 된다.
이란의 정부는 기독교 선교에 대해 심한 탄압을 가한다. 이란에서는 국가 정보부가 주체가 되어 주로 교회 목회자 중에 열정이 있는 주목받는 젊은 리더들을 아무도 모르게 살해한다. 심지어 무슬림 중에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에게 최고의 형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내용의 법안이 현재 발의되어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그런 반면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의 실정에 환멸을 느끼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외부 세계에 대한 동경과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필자가 12년 전에 이란에서 느꼈던 것보다 그 정도가 훨씬 강해졌음을 볼 수 있었다.

반면 터키의 경우 정부가 외국인과 교회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래서 터키에는 수천명의 선교사와 기독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종자 수는 극히 적다.
주로 선교사나 개종자에 대한 탄압이 민간 사회에서 나온다. 정부가 열려있는 만큼 사회와 개인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닫혀있는 것이다.

이란의 교회는 이천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란의 교회가 박해의 고통을 끌어안았기에 십수세기 전에 한국에도, 몽골에도, 중국에도 복음의 씨앗이 뿌려질 수 있었다.  이제 몽골인 중에도 이란에 선교 마인드를 가지고 들어간 사람들이 있고 한국인 선교사들도 나가 있다.  
이들이 이란에 나아갈 때 복음의 미개척지에 개척자로 간다는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곳에서 목숨을 건 신앙의 전통을 보고 배우는 시기를 가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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