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내용은 GO 저널에 실린 글입니다.
네스토리안을 찾아서
이용규
사도행전에서는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향하려고 했을 때 성령이 막으시고 그의 걸음을 서쪽으로 돌리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행 16: 6-10). 이 구절을 많은 사람들이 잘못 받아들여서 하나님께서 아시아 선교를 막으시고 유럽으로 복음이 전해지게 하시고 아메리카를 거쳐 아시아로 성령이 역사하시도록 계획하셨다고 이해한다. 몇몇 서구의 역사학자들은 그 사건은 유럽의 운명을 바꾼 역사의 중요한 순간이라고 이해한다. 그렇다면 장장 1500 여년 간의 역사 동안을 하나님은 아시아 사람들을 버려두셨다는 말일까? 이러한 오해는 서구인들의 인종적인 우위와 아시아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악용될 여지도 많았다.
필자가 중국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마다 문제되는 대목이 있었다. 예수를 모르고 죽어간 자기의 조상들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왜 그들을 버려두셨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 질문의 뒤에는 그들의 조상들을 의도적으로 버려두셨다면 하나님이 신뢰해도 될 정도로 공평하신 분이며 전 인류의 구원자냐는 의문이 있게 마련이다.
한 번은 필자가 하버드 대학의 내륙 아시아학과에서 마련한 신강 위구르 지역 현지 조사를 마치고 온 인류학자의 콜로퀴엄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발표자는 발표 마지막 즈음에서 라마단 즈음에 기독교 선교 단체들이 그 지역의 복음화를 위한 기도 걷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서구인들에 의한 현지인의 토착 문화를 파괴하는 행위의 한 예로 소개했다. 그 발표 현장의 분위기로 볼 때 많은 연구자들이 기독교의 전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다시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 가지 논평해 주려다가 참은 내용이 있었다. 이슬람은 위구르족의 토착 종교가 아니라는 점이다. 중앙 아시아에서의 이슬람은 비교적 신흥 종교에 가깝다. 라마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전에 기독교가 중앙 아시아에서 가장 두드러진 종교였다. 기독교는 서구인의 민족 종교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시아 사람들을 버려두지 않으셨다. 이미 6세기에서부터 14세기까지 기독교는 아시아 전역에 걸쳐서 퍼져있었다. 특히 몽골 제국 시기에 중앙 아시아에는 기독교가 중앙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교세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 기독교 일파는 역사적으로 네스토리안 또는 경교라고 불리웠다. 경주에서 발굴된 신라의 유물 가운데에는 네스토리안들이 사용했던 십자가가 있다. 네스토리안은 이미 한반도 끝까지 도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까지도 건너갔다는 고고학적 흔적도 발견된다. 당시 알려진 모든 세계까지 하나님은 관심을 가지시고 다가가셨다. 어느 누구도 버려지지 않았다. 바울이 가려다가 막힌 지역은 아시아 전역이 아니다. 당시 그리스어의 용례로 보건대 아시아는 소아시아(현재의 터키)와 그 주변 지역을 의미한다. 현대어의 아시아와는 거리가 멀다. 바울이 잠시 버려두었던 그 지역은 결국 얼마의 시간이 흘러서 초대 교회의 후예들의 주요 활동 무대가 되었음을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네스토리안들은 카톨릭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어서 소아시아, 이라크, 페르시아 등 로마의 동방권으로 밀려나게 되었기 때문에 서구 중심의 기독교사에서는 그다지 다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학자들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것은 그들이 믿었던 교리는 카톨릭의 그것보다 훨씬 개신교의 교리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자이신 예수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은 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로 격상시키는 것을 우상 숭배로 보았다. 이러한 신조는 당시 몇몇 대주교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정치적인 논리에 막혀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말았다.
이들 네스토리안들에 의해 동방 선교가 활발하게 벌어진다. 당시 네스토리안들의 선교 중심지인 바그다드는 아시아 선교의 중핵으로 부상된다. 이슬람이 그 지역을 장악하고 난 이후에도 그들은 남아있는 그루터기로써 신앙을 지키면서 타지역으로의 선교사 파송을 지속시켜 갔다.
필자가 이란에 있을 때 테헤란의 한인 교회 목사님으로부터 네스토리안 교회의 성화를 어린양의 가죽에 복제한 작품을 받은 적이 있다.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는 예수의 모습이었다. 그 고통스러운 얼굴은 그 아픔을 받은 자만이 그려낼 수 있는 것이었다. 예수의 핍박과 아픔을 그들은 몸으로 받아냈다. 근대에 들어서 중동의 지역 정권들에 의해 여러 차례에 걸쳐 네스토리안들에게 자행된 대학살과 핍박에서 온 역사의 아픔이 그 그림을 통해서 내게 전해져 왔다.
네스토리안들이 활동하던 지역은 대부분 초대 기독교인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방인(젠타일)은 이들의 조상들이었다. 오순절 사건 때 예루살렘에서 성령부음을 목도했던 주된 민족들도 그들이다. 실은 현대의 왕성한 기독교 국가들(유럽, 미국, 혹은 한국)은 이방인 축에도 들지 못하는 이방인의 이방인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과 섭리로 인해 구원의 반열에 서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해 부름받은 것이다. 현재 이 지역에서의 이슬람의 강성함을 보고 이들 초대 이방인 교회의 후예들인 그들은 이제 버려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다시 바울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바울은 자신의 민족의 역사적 사명에 대해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버려지는 법이 없다. 로마서 11장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의 인류 구원과 종말을 연계시키고 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해서 이방 교회의 영적인 회복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 바울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질투하게 하시려고 이방 교회를 성하게 하신다고 했다.
이제 역사를 통해 보면 이스라엘이 잠시 버려졌던 것처럼 초대 교회의 후예들도 잠시 버려졌음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교회 뿐 아니라 초기의 이방인 교회도 이슬람의 강성함 앞에 빛을 잃고 이제 숨겨진 그루터기만이 남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이스라엘과 이방인 교회의 영적 회복을 말하고 이것이 인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남겨두신 비장의 계획임을 말한다.
이슬람 선교는 이들의 민족 신앙과 동떨어진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자를 찾는 일이다. 우리의 모토는 전도가 아니고 “회복”이다. 자기 것이었던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인이 그 하나를 찾으려고 애쓰는 “다시 찾음”인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소유된 것을 스스로가 피투성이가 되기까지 다시 찾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렇게 하셨듯이 이방인들의 땅에도 “남은 자”들을 예비해 놓으셨다. 현재 그 땅 가운데 남아있는 네스토리안 교회는 그 중의 한 무리들이라고 생각된다. 이스라엘을 첫 열매로 보시고 버리지 않고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이시기에 초대 교회의 첫 열매인 지금 중동 지역의 사람들을 기억하고 계심 또한 당연히 추론할 수 있다. 우리가 이슬람권 내에 “잠시 잃어버린 자”들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게 될 때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배우게 될 것이다. 마치 이방 교회가 이스라엘의 온전히 회복됨을 통해서 같이 온전해짐 같이 이슬람권의 교회 회복을 통해 이방 중의 이방인 교회인 우리의 교회가 변하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움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제 필자는 다음 호부터 시작되는 연재를 통해서 네스토리안들의 역사적인 행적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들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할지를 함께 추구해 보려는 것이다. 우리보다 앞서서 그 땅에 복음을 뿌렸던 선배들의 공과 실을 확인하는 것은 앞으로 우리가 그 땅을 하나님 앞에 어떻게 클레임할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과 맞물려 있다. 이 지역 선교가 세계사와 우리 교회의 회복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그 중요성이 더욱 큰 것이라 하겠다.
사실 청년부 시절부터 갖어 왔던 의문이 다른 모든 사람들이 갖는 공통적인 의문이였다는 생각이 드니, 어쩌면 모든 인간이 참으로 하나님아래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하나님을 모르고 죽었던 그 이전에 조상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생각을 누구나 한번씩은 해봤을 텐데요~ 그 때마다 불편한 방석에 앉은 사람처럼 그저 그 방석을 애써 치워버리려고만 했는데... 이런 깊이가 있었군요!!
이슬람을 향한 전도가 아닌 회복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옴을 안다!! 참!! 앞으로의 네스토리안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하루하루 읽어 나가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