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에 있는 동안 필자는 한국 교회의 쇠퇴에 대한 소식을 접하면서 올 것이 왔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러한 쇠퇴는 예견된 길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쇠퇴의 원인은 가정이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권리를 포기한 것과 교회가 크리스천 가정의 자녀들을 직접 교육하는 것을 포기한 것 두 가지와 관련이 깊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녀들을 교육할 두 개의 기관을 세워주셨다. 바로 가정과 교회이다. 그런데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그 권리와 책임을 방기했다. 즉 가정은 자녀의 신앙교육을 교회주일 학교에 일임해 버렸다.
그리고 교회는 아이들을 직접 가르칠 권리를 포기하면서 우리 아이들은 모두 공교육과 사교육 두 개의 영역에 아이들을 맡겨버렸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아이들을 한 시간 남짓 가르치는 주일학교를 통해서는 세속 가치관의 영향권 하에 일주일을 보내는 아이들을 변화시키기에 역부족이었다.
기독교 가정에서도 자녀들을 교육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데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기독인 가정에서의 교육의 목표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자녀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심지어 고등학생 자녀를 둔 가정에서는 학원에 보내기 위해서 아이들이 주일학교나 수련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을 용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행위는 아이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분명했다. 세상에서의 성공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메시지를 받고 그렇게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우선순위로 정하고 자란 자녀들은 대부분 세상에서의 유혹과 압력을 이길 수 없게 된다.
우리 세대에는 대학교와 군대에서 압박을 받는 가운데 신앙을 얻기도 했던 경험이 있다. 그러나 우리 자녀가 자라는 세대는 달라졌다. 대학과 군대 그리고 직장에서 압력 가운데 그것을 이기고 하나님을 찾기가 점점 어려운 세대로 가고 있다.
우리가 자녀에게 무엇을 유산으로 물려주기 원하는가가 우리의 삶의 가치관과 우선순위를 보여준다. 어떤 부모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원하기 때문이라면 그 사람의 우선적인 가치는 돈이 된다. 혹 자녀에게 물려주기 원하는 첫 번째가 좋은 교육이라면 그 부모의 우선적인 가치는 학벌이 된다. 혹 편안한 삶을 물려주고 싶다면 그것이 그의 첫 번째 가치가 된다.
내가 자녀들에게 가장 물려주고 싶은 것은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다. 아이들이 그 하나님만 만난다면 그래서 고통 가운데 어려움 가운데에서라도 그 분을 신뢰하고 그 분의 선하심을 누릴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이 있다.
그래서 필자는 우리 자녀들을 직접 교육하기 위해서 성경적 가치관과 성품 훈련을 강조하는 SOT라는 커리큘럼을 가진 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름을 코너스톤 글로벌 아카데미로 정했다.
우리 학교를 설립하면서 바라는 꿈은 이 학교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이 학교를 닮은 학교를 인도네시아 안에 많이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이 학교는 학생들이 자기 수준에 맞춰서 각자가 다른 진도를 나가도록 하고 선생님은 공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지도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규모와 저비용으로도 학교를 운영할 수 있다. 이 학교 시스템이 교회와 같이 갈 때 인도네시아 교회는 차세대 부흥을 위한 강력한 엔진을 장착하게 된다.
동양에서는 교육에 있어서 국가의 인증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어 왔다. 이러한 전통이 교회 구성원이 교육을 전담하려 하기 보다는 국가에 교육권을 일임하게 만들었다. 근대 유럽의 민족 국가들이 생겨나면서 근대식 교육 제도가 도입되고 국가가 차세대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서 공립 교육 기관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립 교육의 목표는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다.그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학교에는 규율과 통제와 경쟁이라는 원리가 지배하게 되었다. 미쉘 푸코가 말한 것처럼 근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가 만든 세 가지 기관이 있는데 군대와 학교와 감옥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규율과 통제를 통해서 시민들을 특정 방향으로 몰아가기 위해 세워진 기관이다. 그래서 이 기관에서는 그 안에 들어와 있는 구성원을 한 줄 세우고 경쟁을 부추기며 한 방향으로 몰아가고 통제하는 특성을 가진다.
근대 교육에서는 기독교의 가치관을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훈련도 시키지 않는다. 가르치지 않고 빼트린다는 것은 때로는 하나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즉 가르치지 않는 내용은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고 기억할 필요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교회 안의 대부분 가정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경쟁에서 이기고 승리하기를 기원했다. 어쩌면 그러한 목적의 기도회나 가르침이 흥행에 성공했다. 그래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자녀들을 학원으로 몰아넣었다. 아이들은 너무 바빴다. 남은 시간은 지친 뇌를 위로하겠다는 목적으로 컴퓨터와 스마트 폰과 미디어 엔터테인먼트로 소일했다.
아이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들어가고 그 지식을 적용하는 삶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을 대학에서 하면 된다고 미뤄놓았고 그렇게 들어간 대학에서 아이들은 교회를 떠날 다양한 이유를 찾게 되었다.
한 편 이러한 교육 제도는 유대 전통에 기반한 랍비 중심의 교육과 대비된다. 유대인들은 이천년이 지난 세월 동안 자신의 민족 정체성을 지켜냈는데 바로 토라 중심의 성서 교육으로 인해 그것이 가능했다.
이 교육은 공동체의 종교 지도자인 랍비에 의해서 진행된다. 이 학교는 작고 그래서 개인별로 단계에 맞춰서 가르치는 것이 가능했다. 대부분 질문과 대화를 통해서 수업이 진행된다. 수업의 중요한 요소는 토라를 암송하는 것이었다. 이 단순해 보이는 교육을 통해서 세상에서 가장 창조적인 민족 집단이 만들어졌다.
이제 한국 교회가 교회 안에 삶의 우선순위가 바로 세워져야 함을 선포하고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고 사랑하며 그분을 닮기에 열심 내는 자녀들을 만들어 가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이제라도 용기를 가지고 공교육에 전적으로 내주었던 자녀 교육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
자녀들에게 세속적인 가치를 접하기 이전에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가지는 우월성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필자는 작은 성경적 교육 기관을 교회가 설립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와줌을 통해서 잃어버려지는 다음 세대를 다시 주님께 불러올 소망의 기틀을 만들어 보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