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나아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수치를 당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많은 것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약하고 부족한 부분이 다른 사람들 앞에 드러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내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이런 두려움은 내가 퍼포먼스를 잘 할 때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 예로 내가 집회 때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 것이 느껴질 때는 내게 이런 두려움이 발현된 기제가 내 안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수치심으로 인한 두려움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후예들에게 인이 박혀 있는 두려움이다. 하나님을 자신의 유일한 공급으로 보았던 아담이 스스로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존재가 되려고 했을 때 그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벌거숭이 존재였다.
그것을 가려보려고 아담은 나뭇잎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것은 임기응변이었을 뿐 잎은 쉽게 마르고 찢어졌다. 아담은 계속해서 자신의 부족함을 가리기 위해서 새로운 나뭇잎을 필요로 했다.
돌아보면 나는 체질적으로 부끄러움을 타는 편이고 내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 있는 것을 힘들어 하는 편이다. 내가 집회 사역을 위해 한국 등지로 나갔을 때 사람들이 종종 나와 만나 사진 찍거나 싸인을 받거나 대화 나누고 주목해 주기를 원하곤 했다.
나는 그 분들에게 종종 “시골동네에 사는 아저씨”인 사람을 굳이 특별하게 봐주실 이유가 뭐가 있냐고 묻곤 했다. 나는 나 자신이 시골 아저씨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교만의 죄에 빠져 지내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고 지냈다.
그러나 내 내면 깊숙한 곳에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여겨질 것에 대한 불안감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가 있었다.
새로운 사역지인 인도네시아에서 와서 언어를 배우고 환경에 적응하면서 각종 허가를 기다리고 재정을 기다려야 하는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에는 바쁘게 살긴 했지만 특별히 한 목표를 향해 집중해서 달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오늘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생각나지 않는 때가 있었다. 책을 읽고, 묵상하고, 언어 공부하고, 누군가와 만남을 가지는 등 여러 가지 일이 앞에 있었지만 꼭 무언가를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내야 한다는 생각은 없이 하루를 보내곤 했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가 간혹 선명하지 않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시기였다.
새로운 지역에 들어와서 준비하는 시기라는 특성상 이 과정은 겪어야 하는 코스지만 그간 밀도 있는 시간을 살아가는데 익숙했던 나에게는 어색한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에 들어오기 전에 나는 루이스 부시 박사로부터 세계 변혁 회의(Transform World Summit)에서 교육분과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 후 몇 차례 회의를 섬긴 바 있었다. 초기에 그 회의를 앞에 두었을 때 불안해짐과 동시에 회의에 참석하기가 너무 싫은 마음이 들었다. 감정상으로 패닉적인 반응이 일어나면서 아무런 준비도 할 의욕이 상실되었다. 그리고 우울해지고 내 얼굴이 밝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변의 돕는 분들의 협력으로 그 해 회의는 무난하게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 해에 열린 회의를 앞에 두고서도 동일한 반응이 내게 있었다.
그 회의에서 나는 교육을 통해서 우리가 당면한 과제들이 무엇이고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에 대해 발표해야 했다. 나는 그러한 발표가 내 개인적인 역량의 범주를 넘어서는 너무 큰 부담이라는 생각을 했다.
또 네 시간 정도 분과 세션에서 토론과 회의를 준비하고 진행해야 했는데 전세계에서 온 교계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영어로 회의를 진행해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야 했다. 이런 회의에 참석도 못해 봤고 회의 진행을 위한 영어 실력도 부족한 사람이 진행을 맡게 된 것 자체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일을 맡긴 분은 내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 대학교에서 부총장 역할을 오랜 동안 해 왔기 때문에 내가 적임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일을 맡고 보니 격에 맞지 않고 자격도 없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부담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첫번째 회의가 무난하게 끝났다는 사실도 두번째 회의에 참석하는 나에게는 안정감을 주지 못했다.
그러던 중 문득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내게 나타나는 이러한 반응이 건강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묵상 가운데 여유를 가지고 내 감정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해 점검하기로 결정했다.
내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빛을 초청하기로 하고 그 분의 빛이 내 내면을 조명하시도록 초청하는 것이었다.
내가 발견하게 된 것은 내가 이미 해결한 줄 알고 있었던 문제가 다시 반복적으로 나를 찾아온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결국 표면적으로는 정리되었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 남아있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특정 상황 속에서 수면으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그것은 수치심과 거절감과 관련된 영역이었다.
내가 자격 없고 능력 없고 별 볼일 없는 자라고 여겨지거나 무시 받으면 어떻게 하나 불안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아직 구체적으로 사역이 일어나지 않는 가운데 내 안에 있는 불안감을 잠재우고 내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도구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세계 변혁 회의를 섬기기로 결정한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노력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는 노력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그 회의 가운데 내가 잘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내가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 문제의 근원에는 나의 퍼포먼스 즉 성과와 성취에 의해 내 존재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하는 생각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사탄이 세상 가운데 주는 생각이다. 우리는 퍼포먼스에 우리의 안정감의 근거를 둘 경우 어느 누구도 불안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는 전체 1등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불안감에 시달릴 소지가 크다.
내가 불안해질 때 심지어 하버드 대학교박사 과정을 졸업했다는 커리어도 전혀 나에게 안정감을 주지 못했다. 내가 책을 쓰고 유명해진 사람이라는 사실도 내 불안감을 누르지 못했다.
나의 건강하지 못한 반응의 이면에는 내 건강하지 못한 정체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정체성과 정서적 안정감의 기초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에 두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의해 초점을 맞추다 보니 그들에게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 퍼포먼스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불안해진 이유였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내가 어떤 모습이든지 나는 이미 그 분이 인정하시고 사랑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내가 약한 것을 아시고 나를 도우실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다.
그 분은 그 분 자신을 통해서만 내가 온전함에 이를 수 있고 부족함 없이 만족감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아시는 분이다. 그 분의 사랑에 나의 안정감의 기초를 놓을 때 나는 나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
더 이상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할 필요도 없고 내가 그들의 인정을 받을 필요 없다. 그들의 나를 향한 평가가 어떠하든지 나는 그들을 도울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수 있다.
내가 이 사실을 고백하고 나자 그 국제회의를 앞두고 가졌던 불안감이 놀랍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더 이상 거기에서의 나의 퍼포먼스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 않게 되면서 놀랍게도 나는 평온함과 행복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 회의에서 편안함 가운데 내가 나누고자 하는 것을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좋은 돕는 자들을 통해서 회의 진행을 잘 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내가 발견한 사실은 내가 한국에 들어가서 이미 나를 알고 인정해 주는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는 그 불안감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한편 내가 다시 선교지로 들어가거나 외국에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언가 사역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경우에는 그 불안감이 올라왔다.
돌아보면 내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내 안에 많은 건강하지 못한 정서적 반응이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리고 세계 변혁 회의를 앞두고 내가 보인 반응이 그 때의 그 반응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학교에서 주어지는 과제는 영어가 부족한 외국인인 내게는 감당하기에는 버거울 정도로 많았다. 첫 해에는 나는 주어진 리딩 리스트에 있는 책을 다 읽어가지 못하고 발췌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어떤 때는 토론 주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수업에 들어가야 했다.
그럴 때는 혹 내 부족한 부분이 드러날까 전전긍긍하며 수업 시간을 보냈다. 수업을 즐기며 새로운 것들을 배우는 것보다는 내 약점을 감추고 제법 괜찮은 학생으로 보이기 위해 그럴싸한 질문을 짜내려고 노력하곤 했다.
수업 시간 내내 나의 최대 과제는 내가 가진 약점을 드러내지 않고 방어하는 것이 되곤 했다.
그 시기에는 내 안에 안테나가 계속해서 작동했다. 어린 시절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만들어진 고성능 안테나였다. 그 안테나는 누가 반에서 제일 잘 나가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 나보다 못한 친구는 누가 있는지를 파악해서 내 등급을 확인시켜주는 기능을 한다.
혹여나 내가 가진 약점이 커보여서 불안해지면 나는 학과 동기들 가운데 내게 우호적인 듯하게 보이는 친구들을 집에 불러 대접하곤 했다. 돌아보건대 친구를 대접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나는 때로는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며 환심을 사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즉 나름대로는 그들과 같이 있는 시간을 즐거워하기 보다는 내 안정감을 위해 그들에게 투자한 것일지 모른다.
나는 관대함과 호의를 베푸는 행위도 때로는 자신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안정감을 쌓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았다.
목회자에게 식사 대접을 잘 하고자 하는 마음 가운데 자칫하면 우리의 영적 불안감이 작용할 수 있다. 하나님과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 누군가와 같이 있음으로 해서 대리만족과 안정감을 누리려는 태도이다. 목회자를 대접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잘못된 동기로 대접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목회자를 조종하려고 하기 쉽고 또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때 분노하게 되고 관계가 깨어지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안정감을 누리지 못해서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감이 결여되면 자꾸 주변을 둘러보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되고 그 가운데 잘 나가는 듯한 사람을 보고 부러워하게 된다.
그러면 왠지 그 사람에게 가까이 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잘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한편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면 불편해 하고 힘들어 한다.
혹 누군가가 나를 향해 무시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 분한 마음에 그 사람과 원수가 되기도 한다. 그런 관계에 들어가면 그를 마음 속에서 두고두고 놓아주지 못하고 관계를 풀어갈 수 없게 된다.
단체에서 안정감을 얻기 위해서 자신에게 붙는 타이틀에 집착하거나 조직에서의 자신의 지위나 위치에 관심을 가진다. 또는 지도자나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 열심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원하는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원한을 가지게 되고 험담하려고 한다. 자신의 궁핍함을 조직이나 공동체의 문제로 전가시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이 존중받고 인정받는다고 생각되는 안전한 관계 속에만 머물려 하는 경향이 생긴다.
자기가 편한 방식으로 머물러 있기 위해서 고집이 생기기도 한다. 교회에서 자신이 은혜를 받는 방식을 고집하고 그 방식을 계속 이어가려고 하는 생각이나 어떤 새로운 흐름이나 조류를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는 태도의 배후에는 이러한 불안감이 있다.
자기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잘 용납하지 못하고 의심하기 쉽다. 그리고 자신을 지적하고 교정하려는 사람에게 분노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영적으로 완고해져서 심지어 성령님의 교정에 대해서도 반응하고 싶어지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 교리에 집착하거나 무엇이 맞는지를 따지는 태도 역시 우리가 가지는 영적 불안감과 관계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신이 없을 때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우리가 전도하는 가운데 상대방과 논쟁을 하게 되는 경우에도 비슷한 원리가 작용하는 경우가 있다.
선교사가 사역지에서 오래 사역하다 보면 하나님의 은혜보다 사역에 대한 부담이 더 커 보이는 시점이 있다. 그 사랑 때문에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세상이 주는 시각을 가지고 자신이 낸 성과에 근거해서 자신을 평가하고 규정하게 된다. 복음으로 시작했는데 육으로 마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복음 안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고 그 분이 보시는 눈으로 내가 나를 볼 때에만이 이 안정감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자녀를 교육함에 있어서 경쟁을 강조하게 되면 아이들의 영혼이 메마르게 된다. 경쟁과 성적과 성과를 강조하는 교육에서 아이들은 복음적 진리를 누리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그저 낙오되지 않으려는 불안감에 이끌려 그들의 삶을 채워가게 된다.
두려움에 이끌려 하는 공부는 학생들에게 만족감과 행복감을 주지 못한다. 경쟁 체제 속에서는 전교 일등부터 꼴등까지 불행해지는 구조 속에 붙들리게 된다.
나는 서울대학교의 교수들 중 많은 사람들이 열등감과 불안감으로 인해 이상 행동을 하거나 정서적 불안을 학생들에게 표출하는 것을 보아왔다. 그들은 남들에 비해 경쟁에 앞서 있는 듯 보이는 사람들이지만 여전히 불안감이 그들의 삶과 가정과 관계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아이들을 교육시키려 하게 되면 아이들은 불행해지게 된다.왜냐하면 부모가 불안해지면 아이들의 성적과 학업의 결과에 집착하게 된다.
그런데 부모가 불안해지면 자녀가 아무리 자기 수준에서 최선을 다했어도 부모를 만족시킬 수 없게 된다.
결국 자녀는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고 좌절하며 더 나아가 부모를 원망하고 부모자식간의 관계가 파괴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