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아가 내게는 또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복합적으로 있었다. 그것은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내 사역 초기에 나는 자카르타 연합교회의 초청을 받아서 교회 안에 사무실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캠퍼스 부지를 기증받았고 초기 사역을 시작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도움을 받았다.
한편 교회 안에서는 원래 교회가 하려 했던 사역을 내게 이양하는 것에 대해서 불편한 마음을 가진 분들도 있었다. 그 분들은 나의 동기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고 내 존재를 믿어주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 교회에서 가끔 설교도 하고 교인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교회 안에 있으면서 외로움을 느꼈다.
나는 현지에 있는 교회 안에 있으면서 도움을 받고 있었기에 다른 선교사들에 비해서 훨씬 안정감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단지 몇몇 사람들로 인해 느껴지는 거절감만으로도 외로움이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외로움은 내면의 건강함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가와 무관하게 찾아올 수 있다.
또한 이런 상태로 오래 있게 되면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마음이 외로워지고 마음이 건강한 상태가 아니면 따뜻한 배려를 갈구하게 된다.
그런 중에 어떤 여성이 무언가 따뜻한 말을 건네거나 자신의 말에 공감해 주면 그 배려를 다른 관점으로 해석하거나 자칫 그 배려를 이기적으로 악용하려는 욕구가 생기면서 잘못된 애착으로 발전시킬 소지도 있다.
이미 앞선 책에서 나는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런데 돌아보면 내 삶 가운데 여전히 못 박히지 못한 모습들을 보게 된다. 또한 내가 그토록 믿음에 대해서 설교하고는 여전히 불안해하는 내 모습을 만날 때 오는 자괴감이 있었다. 설교를 하고 글 쓰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의 온전하지 못한 모습들이 거슬림이 된 적이 있었다.
한 번은 큰 아들 동연이가 죄책감으로 인해 괴로워했던 적이 있다. 우리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직접 채점을 한다. 학생들에게 책임감과 정직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동연이가 교재 진도를 빨리 나가고 싶은 충동이 강했다. 동생들이 진도를 빨리 나가는 것이 마음에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강 공부하고 적당히 채점하는 일이 있었다.
그 후 그것이 마음에 자책이 되어서 어려워 한 것이다.
그 때 내게 이렇게 울면서 물은 적이 있었다. “아빠, 죄를 지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또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자꾸 죄를 짓게 되는데 어떻게 해야 해요?”
그 질문에 나는 바로 답을 못했다. 어쩌면 이것은 한편으로는 내가 경험하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가운데 반복되는 죄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들은 밭을 기경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봄에 밭을 갈고 농작물을 심고 난 후 다시 겨울이 지나면서 더 깊숙한 곳에 있던 돌들이 땅이 녹으면서 올라오게 된다. 그러면 그 돌들을 다시 제거하기 위해 밭을 갈아야 한다. 다음 해가 되어서도 밭을 다시 갈아서 올라오는 돌들을 제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우리의 죄의 문제를 수술해 주시고 만져주시고 치유해 주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더 깊숙한 곳에 있던 문제들이 차례로 올라오게 되고 그것들은 지속적인 다루심 가운데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내면이 깊이를 더해가면서 치유를 누리게 된다. 깊은 병의 경우 먼저 증상을 다스리고 나중에 어느 정도 회복된 후 더 깊숙한 병의 뿌리를 다루어 가야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문제를 다루실 때 시간의 간격을 두고 더 깊이를 더해 가시는 것을 보게 된다.
진리를 알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말은 바로 우리가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마음을 열어 그 진리를 누리게 될 때 우리를 묶고 있는 우울함, 열등감, 거절감, 외로움, 불만족, 불안감 등에서 자유하게 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복음을 내 삶의 구석구석에 적용하며 그 분의 빛에 내 복음적이지 못한 삶의 영역들을 노출하게 될 때 위의 부정적인 감정이 사라지고 평안과 만족감과 안정감이 나를 사로잡게 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