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다. 본토를 떠난다는 것은 나그네와 이민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본토를 떠나서 떠도는 삶은 고달픈 삶이다. 그런데 이 고달픔의 여정은 우리에게 특별하게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를 제공한다.
성경에서 확인하는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경험한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렇게 집 떠난 삶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여러 계기를 통해 한국 백성들을 세계 가운데 흩으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본다. 비근한 예로 많은 한국인들이 자녀 교육 문제, 외국어 교육 열풍, IMF 사태, 한국 사회의 안전 문제, 정치적 환멸, 세계화 등 다양한 이유로 고국을 등지게 되었다.
이렇게 떠난 사람들은 고국에 머물러 있었을 때는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다양한 문화적 충격과 어려움과 외로움 가운데 기존 세계관이 깨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 깨어짐 가운데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여지가 생겨나기도 한다.
필자가 경험한 본토를 떠난 삶 가운데 오는 고달픔 가운데 하나가 비자 문제이다. 타국 시민으로서 남의 나라에 들어가서 살기위해서는 입국 허가가 필요하다.
필자는 미국 유학 시절 한인 교회의 성도들의 삶의 애환의 한 복판에 비자 또는 영주권 취득과 관련된 문제가 있었음을 본다.
필자는 유학 시절과 또 안식년 기간에 학교를 통해서 비자 문제를 비교적 쉽게 해결한 편이긴 하지만 여전히 비자를 발급받고 유지하는 데 긴장된 시간을 경험하곤 했다.
한 번은 안식년 기간 중에 비자 만료가 가까운 시기에 캐나다에서 집회 요청이 있었다. 거절하기 어려운 집회여서 캐나다에 들어갔다가 다시 미국 국경으로 들어올 때 문제가 되었다.
학교에서 받아간 서류가 싸인된 시점이 삼 개월이 지났기에 유효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출입국 사무소 관리가 필자의 입국을 지연시키다가 입국을 허용해 주었던 적이 있었다. 만약 입국이 거부되면 복잡하고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미국 재입국이 늦어지는 사태가 발생하면 일정이 뒤엉키고 또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미안한 상황이 벌어지고 많은 노력과 돈이 소요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에 들어가기 전 2012년 7월 중순에 넷째 아이가 태어났는데 우리 가족의 비자는 7월 말로 만료되는 상황이었다. 미국 비자를 신청할 당시만 해도 아이가 태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7월이면 미국 생활 정리하고 돌아오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비자 기간을 더 넉넉히 신청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보통은 유예 기간(grace period)가 있어서 비자 기간을 넘어서 한 달 정도까지는 더 체류하더라도 법적인 문제는 없을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머물렀던 애틀랜타 주는 반이민 정책을 가지고 있어서 외국 이민자들에게 강경한 정책을 펴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운전면허 기간을 비자 기간까지만 주기 때문에 비자 기간을 넘어서면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7월 초에만 태어나도 한 달간 여권 작업을 해서 8월 초에만 미국을 떠나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7월 중순에 아이가 태어나면서 아이 병원과 여권 문제 때문에 두 주간을 운전면허가 없는 상태에서 몇 차례 차를 운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변호사를 사서 합법적인 체류 신분을 며칠 더 얻는 것은 너무나 많은 비용과 에너지가 드는 일이었다. 외국인으로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만나게 되는 예기치 않던 문제였다.
몽골에서 살면서도 많은 선교사들이 억울하게 추방을 당하는 상황을 맞는 것을 목격했다. 많은 경우 교회 안에서 갈등이 나타나 원한이 생기거나 현지인 지체가 물질의 유혹을 받을 때 선교사의 약점을 이용해서 고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렇게 되는 경우 외국인이 무조건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어 때로는 가구와 차도 놓아두고 쫓겨 나가야 하는 상황도 생겼다.
중국이나 중앙 아시아에서도 많은 선교사들이 경찰의 습격을 받아서 집을 떠나 피신하고 또 비자 연장이 되지 않아서 쫓겨 나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인도네시아는 식민 지배를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정부가 외국인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가지고 감시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외국인이 비자를 발급받기 어렵게 까다로운 절차를 만들어 놓았다. 외국인이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더욱이 직책이 바뀔 때마다 비자를 새로 받아야 하므로 외국에 나가서 비자를 새로이 발급받고 인도네시아에 들어오도록 한다.
그래서 필자가 한 선교사를 인도네시아에서 만났을 때 필자의 가정에 아이들이 넷인 것을 보고 첫 마디가 “비자 내는데 돈이 많이 드시겠네요”였다.
필자의 가정은 지금 새롭게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서 한국에 나와 있다. 지난 번 우리 가정의 비자를 대행해 준 업체가 비자 발급 과정에서 행정직원들과 짜고 정직하지 않은 방법을 쓴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많은 벌금을 지불하고 전 가족이 급하게 한국으로 나와야 했다. 이 과정에서 약속했던 집회와 일정을 일부 취소해야 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학기 중임에도 불구하고 데리고 나와야 했다. 비자가 언제 다시 발급될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다. 잘못은 다른 쪽에서 했지만 어느 누구 책임지지 않고 결국 외국인 당사자가 금전적, 법적, 시간적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을 경험하면서 또 한 번 나그네로 사는 삶이 가지는 서글픔을 경험한다.
이 과정에서 또 다시 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었다.
“이 나라가 나를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걸까? 이 사람들은 관심 없는데도 굳이 이들에게 ‘내가 좋은 사람이고 쓸만한 사람인데 내가 당신들을 도와줄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라고 사정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나님 내가 꼭 이 나라에 있어야 하는 것인가요?”
비자와 같은 문제는 내가 계획대로 그리고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기에 이런 문제는 나로 하여금 더 깊이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만든다.
많은 이민자들이 그 땅에 남아 있으려는 대부분의 이유는 돈 때문일 것이다. 이민 생활의 불안함을 극복할 유일한 대안이자 힘든 삶의 댓가가 바로 물질적인 보상이다. 그래서 조국 없는 떠돌이 삶을 살았던 유태인들이나 중국인 이민자들이 돈을 버는데 악착같았던 것이리라.
그러나 내가 인도네시아 땅에 있는 이유는 돈이나 사역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기 위해서 인도네시아에 머물러 있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부르신 바 된 그 땅에 머물고자 하는 이유는 결국 예수님에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천국 복을 나누기 위해 오셨을 때 그 분은 환영받지 못했다.
오히려 헤롯 왕은 그 분이 오시는 것을 막기 위해 예수님 나이의 어린 아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이기에 그 분의 발자취를 쫓아 환영받지 않은 자리에서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 분이 떠나라고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어떤 댓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이방인의 신분으로 그 땅에 남아 있어야 한다.
실은 크리스천은 천국 시민권을 가지고 이 땅에서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비난받는 것에 대해 억울해 하기 보다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이방인으로 사신 것처럼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이 땅에서 하늘로부터 오는 사명을 따라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