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국 노마드 - 인도네시아 이용규 선교사 웹사이트입니다. ::

새로이 책을 위한 글쓰기 작업을 하는 지금 기도 시간을 알리는 모스크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를 통해서 내가 새로운 환경 새로운 문화 속에 들어와 있음을 새삼 느낀다. 몽골에서 한국을 거쳐 미국 애틀랜타로, 다시 애틀랜타에서 한국을 거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일년간 가족과 함께 네 나라를 넘나들었다. 그 사이에 가족 구성원의 숫자가 한 명 더 늘었다.

이번이 벌써 결혼 후 삼 개월 이상 거주한 경우만 따져서 열 번째 이사가 된다. 그리고 앞으로 열 한 번째 열 두 번째의 이사가 우리 가족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인도네시아에 들어온 다음 날부터 국립 인도네시아 대학교의 언어 과정에 출석했다. 이미 수업이 시작한 후 두 주가 지나서 늦깎이 학생으로서 뒤늦게 수업에 참여했다. 대학교의 행정을 맡고 대학의 방향을 설정하는 일을 하다가 어느 새 다시 학생의 신분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박사 과정을 마친 이후 다시는 학생 시절로 돌아갈 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예전 학생 시절에는 시험을 보는데 시간에 쫓겨서 당혹해 하던 꿈을 꾼 적이 있었는데 그런 꿈을 꾸지 않게 된지 어느새 오랜 시간이 지났었다.  어쩌면 하나님은 내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배움의 도전 가운데 있도록 나를 새로운 상황과 환경 속으로 밀어 넣기를 원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세어 보니 어느 새 인도네시아어가 내가 열 번째로 공부하는 언어다. 언어에 재주가 없는 사람에게 끝없이 동일한 도전을 반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 아직 다 이해되지는 않는다. 확실한 것은 이 불가해한 일들 가운데 순종이 더해질 때 새로운 영적 지평이 열려간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러한 언어 훈련 과정의 배경에는 나를 영적인 어린 아이로 빚어내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사람은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마다 어린 아이가 되어야 한다. 자기가 가진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고 자신이 알고 있는 단어에 맞춰서 표현을 제한할 수 밖에 없다. 표현에 있어서 어린 아이가 된다. 새로운 사회 문화적 환경 속에서 자신이 가진 옳고 그름의 기준을 양보하고 자신을 둘러싼 문화의 기준을 수용하고 맞춰가는 연습을 한다.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쌓은 자들의 교만을 꺾으시면서 언어를 흩으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린 아이처럼 만들기 위해 조성하신 환경이다. 그러한 환경을 만드시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도전하셔서 새로운 환경에 들어가게 하셨다. 나이든 아브라함을 영적인 어린아이로 만드시기 위해서 계획하신 방법일 것이다.

최근 이년간 우리 가정이 몽골에서 떠나고 또 넷째 아이를 갖는 과정 속에서 떠남이라는 단어를 지속적으로 묵상하게 되었다. 물론 떠남이라는 주제는 어쩌면 우리 가정이 몽골로 들어가기 이전부터 묵상해온 것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나는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불러서 옛 삶에서 떠나게 하시고 새로운 환경에서 하나님과의 연합의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시간을 가졌다. 이러한 떠남은 현실 도피 내지는 책임 회피와는 다른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부담을 못 이겨서 도망하는 것과도 다르다. 또한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환경에서 이사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의 옛 삶, 오래 익숙해 온 세계관, 오랜 동안 젖어온 가치관, 구습과 옛 태도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고정된 사회적 틀이나 일상으로부터의 벗어남을 의미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종종 이러한 일상의 제약들이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을 묶어버리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환경의 변화와 새로운 환경 속으로의 유입은 과거의 나를 좀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단 우리가 깨어있지 않으면 새로운 환경 가운데 우리는 예전의 자아와 습성에 더 구속되고 붙들릴 수도 있다.  하나님의 우리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심은 우리를 새로운 영적 사회적 환경 속으로 인도해 간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영역에서 떠나도록 초청하신다. 우리가 신뢰 가운데 그 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새로운 여행을 출발한다면 우리는 변화를 경험하며 그 분과 더 깊이 연합하는 과정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이 글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초청에 대한 나눔이다.

 

우리 가정이 인도네시아에 들어오기 전에 비자 수속을 위해서 한국에 반 달 정도 체류했다. 머무는 기간 동안 병원 진료를 위해 입원해 있던 시간을 제외한 며칠 동안 몇몇 성도들을 만나서 기도해 주었다. 이 분들은 다 한국에서 볼 때 누구나 선망하는 직업이나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경제적인 면에서 안정된 삶을 가진 분들이었다.  나는 그 분들의 삶 가운데 있는 불만과 아픔과 좌절이 있음을 보았다. 그 영혼을 향한 긍휼함 때문에 간절히 기도해 주고 또 위로와 권면의 메시지를 나누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다지 가진 것이 많지 않고 몽골에서 이리저리 구르며 고생하던 사람이 한국의 교회 안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처럼 보이는 분들을 위해 위로하며 나누어 줄 것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게 놀라운 발견이었다.

많지는 않지만 몇 곳 수도권 인근의 교회들에서 약속한 집회를 하는 가운데 나를 당혹스럽게 한 것이 있었다. 그래도 비교적 건강해 보이는 교회에서의 집회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얼굴이 전반적으로 너무 어둡다는 것이었다. 다수의 성도들이 삶의 무게에 눌려 있어 보였다. 예배에서도 메마름이 느껴졌고 성도들의 영혼에도 굶주림과 갈증이 있음을 보았다. 하나님을 알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사람들의 얼굴 같았다.  말씀 시간 전에 하나님께 기도 드렸다.

하나님, 이들이 안에서부터 외치는 소리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뭔가요?”

그 소리를 들으려고 했는데 제 안에 들려지는 몇 단어가 있었다.

힘들어요. 버거워요. 견디기 힘듭니다.”

감사하게도 내가 그들의 그러한 내면의 소리를 듣는 가운데 내 안에서 그들을 향해 던져주고 싶은 답이 떠올랐다.  나는 내가 지난 이년의 시간 동안 하나님께 질문하고 부딪히고 경험했던 것들이 이 분들을 위한 하나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여전히 질문이 있었다.

하나님, 굳이 제가 답해야 하는 것인가요?”

우리 가정의 인도네시아에 들어온9월 어느 주일에 자카르타 연합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설교 주제 말씀이었던 여호수아서 4 1절에서 9절의 말씀이 내게 새롭게 부각되었다. 하나님께서 이 구절을 통해서 내게 이번 책에 대해서 주시는 메시지가 있다고 느꼈다.

요단 강은 삶과 죽음, 세상과 영원의 경계선을 의미한다. 그 요단 강에는 수많은 광야의 돌들이 흘러 들어가서 깨지고 다듬어진다. 그 가운데로 여리고 성을 향해 전진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간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믿음을 발걸음을 내디뎠을 때 요단 강이 갈라졌다. 그 강의 건너고 난 후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기를 열 두 명의 리더를 뽑아서 열 두 돌을 그 강이 그쳐 말라버린 그 땅의 한 복판에서 가지고 나오라고 하셨다. 여호와는 그 돌들을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길을 기억하게 하는 징표로 삼고자 하셨다. 그 강바닥에는 많은 돌들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 열 두 개만을 택하라 하셨다.

나는 또 하나의 책을 써야 한다는 부담 가운데 하나님께 묻고 있었다. 

하나님, 왜 나의 이야기를 원하십니까?  이미 동일한 은혜를 경험한 많은 분들이 있는데, 그리고 그것을 더 잘 전할 수 있는 분들이 있을 텐데…”

하나님은 그 말씀 가운데 내게 이렇게 도전하신다고 느꼈다.

그 강에 있는 모든 돌들이 나의 인도함의 증인이다. 그 모든 돌들이 귀하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돌들이 다 징표로 세워지지는 않는다.  그 가운데 택해진 것 몇 개만이 상징적인 징표로서 길갈에 세워져서 나의 선한 인도함의 증거가 된다.”

하나님께서 나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서 누군가를 회복하고 위로하며 다시 세우기를 원하신다는 생각을 갖게 되자 나는 다시 글 쓰는 자리로 나올 수 있었다. 네 아이들과 인도네시아라는 새로운 문화적 영적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이 분주한 소용돌이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게 다시 글을 쓰라는 부담을 주셨다.  지난 이년간 내 삶 가운데 개입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대해서 기록하라는 부담이다. 이 이야기가 굳이 이 시점에서 씌어져야 하는 이유의 한 복판에는 한국 교회 상황에 대한 탄식과 아픔이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살아간다.  예수님을 믿는 이유도 행복하기 위해서인 경우를 본다. 그런데 행복을 추구하는 그 삶 가운데에서 우리는 행복을 찾지 못한다. 행복이 목적이 되면 우리는 삶의 어느 순간 스스로를 불행하게 보기 시작한다.  행복은 삶의 과정 가운데 자연스럽게 발견하는 것이지 그것이 목표가 된들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러나 행복이 목표가 되면 예수님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예수님을 믿는 것 그리고 그 분과 연합하는 일은 행복해지는 것보다 훨씬 큰 가치이다.  행복은 그 연합의 자연스러운 결과물일 따름이다.  지금 우리 가운데 누군가 행복하다는 느낌을 잃어버리고 있다면 이 책의 내용을 통해서 기본적인 것들을 다시 점검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앞으로 나눌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해주시지 않았던 일로 인해 좌절과 상처를 경험한 이들, 현실의 버거운 짐 때문에 비틀거리며 자신이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향한 것이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이야기가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고 그로 인해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그것을 새롭게 인내하는 힘과 소망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을 가져본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독자에게는 그 분과 함께 걸어가는 삶의 여정의 한 예가 이 글을 통해 전달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아직 그 분을 모르는 분들에게는 아직 가보지 않았던 길에 대해 새로이 도전할 용기를 줄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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