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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문제를 내려놓음

한국에 집회 인도와 출장으로 나가 있었을 때, 몽골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다. 아내의 목소리가 가라앉았고 힘이 없음을 느꼈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물었다. 아이들이 사소한 것 가지고도 서로 계속 싸운다는 것이다. 나는 종종 아이들이 싸우거나 떼를 쓰고 억지를 부릴 때 견디지 못해 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게 된다.

아내가 특히 힘들어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육아에 대한 책을 보고 싸우지 않도록 아이들을 키우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육아에 대한 기대치가 스스로 높아있을 때였다.  
아이들이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아이들을 키우면서 순종하고 성숙하고 사랑이 많은 아이로 양육한 예, 또는 어떻게 키우는 것이 바른 양육인가에 대한 높아진 기대 수준으로 인해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든다는 것이다.
자녀 양육법에 대해서 배우면 배울수록, 자신의 기준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자신의 현실과의 괴리 때문에 힘들어지는 것이다.

사탄은 아이들을 통해서 우리의 자존감을 건드리고 힘들게 한다.  특별히 아이의 성숙과 부모의 자존감이 밀착된 경우에 어려움이 온다. 부모가 상황에 맞지 않는 과다한 기준을 스스로에게 제시하고 그것이 아이들을 통해서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인해서 좌절하기 쉽다.

아내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스스로가 얼마나 이기적인 자인지를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아내는 기도 가운데 과거를 돌아보니, 동연이가 태어났을 때 비록 이틀간의 경험이긴 했지만 산후 우울증으로 힘들어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고 한다.
아가의 탄생을 기뻐하기 보다는 첫 출산 이후 육신적으로 너무나 고통스러움으로 인해 자신에 대한 연민이 산후우울증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또한 동연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힘들어하면서 학교에 안 가겠다고 울 때, 화가 치밀어 아이를 침대에 던진 적이 있었다. ‘도대체 내 아이가 왜 이 모양이야?’라는 생각에 씩씩대곤 했다.

하나님과의 교제로 나아가는 중에 하나님께서는 아내와 나에게 동연이와 서연이 안에 있는 상처와 어려움에 대해서 알게 하셨다. 연구소에 나가면서 울고 발버둥치는 아이를 그냥 두고 나갔다 와서도 퇴근 후 아이의 엄마에 대한 사랑을 채워줄 생각도 못하고 자신의 시간과 삶을 찾아서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던 것을 기억나게 하셨고, 그 때 아이가 느꼈을 거절감에 대해 깨닫게 하셨다.

아내는 자신의 깨닫지 못했던 죄와 허물이 하나님의 빛 앞에 드러나자 억장이 무너지는 듯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감사의 제목이 되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깨닫고 치유를 위해 기도할 수 있기에. 아내는 자신이 어떻게 이것을 풀어야 할지 모른다고 하나님께 고백했다.

자신의 실수와 아이들에게 있는 상처보다도 더 크신,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의 복음의 은혜를 새롭게 경험하고 나서 아내가 자녀 양육에 있어서 첫번째로 고백한 것은 ‘내가 내 힘으로는 아이를 잘 키울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다음은 아내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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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연이는 남자아이였지만 비교적 순한 아이였기 때문에 나는 자신의 성품, 인격, 신앙 정도면 잘 키울 수 있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많은 주위 경험을 통해서 변해가는 동연이와 고집이 센 서연이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과 선함으로는 아이를 바르게 양육할 수가 없음을 절감했다.

그러고 나니 나는 스스로 안에 남들이 보지 못하는 교만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동연이와 서연이가 하나님의 아이들이라고 머리와 입술로는 고백하지만 이 때까지 진지하게 하나님께 단 한번이라도 “하나님의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기 원하시는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자녀 양육은 하나님께서 물어보실 가장 첫 번째의 청지기 사역임에도 불구하고 이 중요한 사역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은 것이다. 나 정도면 잘 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자기 의가 겸손을 가장한 채 내면에서 숨기어져 있었다.

이제 자녀 양육 과정에서 겸손해질 수 밖에 없었다. 나 자신은 아이들의 행동이나 감정 하나 제어할 능력이 없고 아이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없음을 여실히 보았기 때문이다. 동연이는 이제 만 8살, 서연이는 만 4살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이제사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고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 묻게 되었다.
기도하면서 내가 하나님과 원활한 교제를 이루는 것이 자녀 양육에 있어서 최우선 순위가 된다.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면 아이들에게 바른 하나님을 증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나의 힘인가? 내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는가? 그분이 나의 길을 지도하실 것에 대한 신뢰가 있는가? 내가 여호와를 바라고 있는가?
이것이 자녀를 키우는 부모로써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다 (신명기 6장 6, 7절 참조).

구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라고 확신하고 밀고 나갔지만 그것이 옳은 방법이 아닌 것을 발견한 경우가 수없이 등장한다. 사람의 눈에는 옳아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바로 그것이 아니었다.
죄의 중요한 정의 중 하나는 과녁을 맞추지 못한 모든 것이다. 과녁에 맞지 않았다면 과녁 옆에 화살이 떨어지는 것도 죄가 되는 것이다. 자녀 양육에도 마찬가지다. 자녀를 허락하신 주님의 뜻을 넘겨짚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정확한 이해를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상 아내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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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아울러 아이들에게 허락된 모든 부분을 감사로 받고 아이들에 대해 항상 기뻐하는 것이 문제를 풀어가는 다음 단계의 실마리임을 보았다. 우리가 육아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허락하신 아이에 대해 감사함으로 반응하기 보다는 육아에 대한 부담이 더 크기 때문이다. 아내가 이기는 방법은 자신의 ‘이렇게 해야 옳다’고 하는 기준을 포기하고 또 ‘앞으로 아이들이 어떻게 될까, 더 나빠지면 어떻게 되나’하는 걱정과 두려움에서 자유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다음은 아내의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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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가 이 모양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니 내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서연이는 생후 4개월 때부터 낯을 심하게 가렸다. 몽골에 와서도 어디 식당에 가서도 밥을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다. 주위에 서연이 또래의 여자 아이들이 낯을 가리지 않기에 자유로운 엄마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많이 속상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때인가 ‘서연이는 도대체 왜 이렇게 까다로운가’라는 태도에서 ‘이러한 독특한 서연이를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딸로 허락하셨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서연이를 인정하니까 마음이 자유로와 지고 서연이에 대해 더욱 관대해졌다.

또한 나는 아이들 중에는 잘 싸우는 타입의 아이들이 있고 또 성별, 연령 구성상 잘 싸우는 경우나 서로의 다름에 대하여 관용하지 못하고 싸우는 시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동연이와 서연이는 동에서 서가 먼 것같이 여러 가지 면에서 너무나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성별도 다르고 나이도 4살이나 터울이 진다. 오히려 어린아이들이 싸우지 않고 잘 지내기를 바라는 자체가 욕심일 수도 있다. 아이들의 부족한 모습을 보면서도 힘들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율법과 윤리가 아닌 복음의 진리로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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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아내는 육아에서의 힘든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의 현주소를 볼 수 있었다. 마치 아내의 어려움을 통해서 내가 내 현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아이들의 문제는 실은 변화되지 않은 나의 문제와 맞물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부모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아이들을 사용하시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이 부모에게 준 숙제를 풀지 못하면 아이들과의 관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아이들의 문제를 통해서 드러나는 자신의 영적인 죄들이 빛 가운데 드러날 때 가슴 아프고 인정하기 어려웠다. 부인해 버리고 차라리 덮어두고 싶기도 했다. 아이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것이 아이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 때문이었던 것이다.
우리를 하나님 나라와 세상 중간의 회색 지대, 자신의 안전 지대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서 어려움을 주신다. 자녀의 문제로 인한 어려움이 아니면 우리가 그곳에서 나오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자녀를 통해서 어려움을 주시는 것이다. 주님이 물으신다.

“너희가 진정으로 낫기를 원하느냐?”

하지만 우리의 내면은 병을 인정하고 싶지 않거나 그냥 병을 사랑하며 그대로 그 상태로 머물러 있고 싶어 한다. 지독한 고통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계속 현상 속에 머물러 있으려 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아내는 자신의 변화를 통해서 달라져가는 아이들과의 관계를 보면서 기다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되었다. 다음은 아내의 말이다.

나는 서연이가 태중에 있을 때부터 이 두 자녀가 하나님 나라에서 아름다운 동역자가 되기를 위해 기도했었다. 계속 그렇게 기도하건만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는 한 현재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싸우는 것을 볼 때마다 분노의 감정이 앞서고 그 소망을 포기하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믿음을 붙잡고 소망을 품고 나아갈 때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서로의 다름을 보완해서 아름답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동역할 남매가 될 줄을 소망한다.

아내 자신의 영적 성장도 수십 년이 지나서야 시작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듯이 아이들에게도 변화를 위해 기다려야 할 시간이 있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내를 나와 함께 몽골 선교사로 부르셨다. 아내의 신앙 상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하나님께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아내를 인도해 가셨고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당신을 더욱 새롭게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해 가셨다.
선교지에 나온 순종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몽골 땅에서 아내를 위한 가장 귀한 선물을 준비해 놓으셨던 것이다. 물론 이 선물은 연단의 눈물 없이는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아내와 나를 신실하게 인도해 오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해서도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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