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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자기 애에 집착하는 우리의 모습을 야곱에 빗대어 설명한 부분입니다.  강해 설교이기 때문에 딱딱한 느낌이 들어서 뺀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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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야곱의 변화

창세기 32장 1-32 절

야곱의 얍복 강가에서의 변화 직전의 모습은 많은 면에서 두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 변화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나 변화되기 이전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야곱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리고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즉 하나님과 자신이 직접 관계를 맺지 못했지만 자신의 조상들이 만났던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는 천사들을 가까이에서 대면한 적도 있었다. 벧엘에서 천사가 오르내리는 사닥다리를 환상 가운데 보았으며 또 마하나임이란 곳에서 하나님의 군대와 마주치기도 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복 주실 수 있는 분임도 잘 알았다. 하나님의 복을 얻기 위해 그는 형 에서와 경쟁했으며 아버지 이삭을 속이기도 했다. 어려운 순간에 닥쳐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를 구했다. 적어도 자신보다 더 약은 외삼촌 라반의 꾀로부터 손해를 입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돌봐주심도 경험했다.
어쩌면 초년병 선교사로 나와 있었던 아내가 가지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이 수준이 아니었을까 한다.우리는 이 정도 수준이면 교회에서 믿음이 좋다고 인정받을지 모른다. 하나님에 대한 체험도 있고 또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또 그 분에 대한 경외감도 있으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야곱을 쓰시기에는 결정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연단의 시간을 야곱에게 허락하신다.

야곱에게 평생 넘어야 할 산처럼 여겨지는 것이 있었다. 바로 에서와의 관계에서 오는 문제였다. 하나님께서 야곱보다 힘이 세고 더 남자다운 사냥꾼 에서를 야곱에게 붙이신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 이미 야곱 쌍둥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형 에서의 후손이 동생인 야곱의 후손을 섬기게 될 것에 대해 정해 놓으셨다 (창 25: 23). 야곱이 그토록 힘들어 하던 에서와의 관계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미 정리해 놓으셨다.
야곱은 그것을 보는 믿음의 눈이 없었을 뿐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야곱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고 자유분방하게 살았던 에서는 야곱을 훈련시키기 위해 사용된 수단일 뿐이었다. 우리의 신앙 생활 가운데 “저 사람만 없으면 내가 참 편하게 신앙 생활할 수 있을 텐데”라고 하며 힘들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가시 같은 존재인 그가 어쩌면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에서와 같이 잠시 사용하는 연단의 도구일지도 모른다.

야곱이 하나님의 복에 대해서 오해한 것이 있었다.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쟁취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야곱에게 주어질 복은 팥죽 비슷한 스프 한 그릇이나 또는 아버지 이삭의 축복 여부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으로 이미 예정되는 것이다.
야곱이 자신의 수단을 사용하면 할수록 그는 힘든 상황 속으로 들어갔다. 비록 어머니가 시킨 일이긴 하지만 아버지를 속이고 형에게 갈 축복을 가로챔으로 해서 그와 에서의 문제는 더 꼬여갔다. 야곱은 힘으로 이기기에는 부담스러운 상대인 형을 피해 달아나려고 했다.
그 결과로 야곱은 자신보다 더 약은 외삼촌 라반 밑으로 들어가 다른 종류의 연단을 받았다. 에서와 라반 사이, 지역적으로는 가나안 북쪽의 밧단 아람에서 가나안 동남쪽의 에돔의 사이에서 그는 샌드위치 신세가 되었고 결국 그 연단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된다.  

야곱은 후에 이집트의 파라오 앞에서 자신의 70 평생을 회고하면서 “험한 세월”을 살았다고 고백한다. 평생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추구했던 야곱의 고백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기로 예정하신 복은 야곱이 얻고 싶었던 복과는 다른 것이었다.
야곱이 원했던 복은 장자권, 물질적 축복, 안전과 평안의 복, 자녀의 복 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무엇보다 야곱에게 주기를 원하셨던 복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을 주시기 위해 먼저 해결해야 할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야곱 자신의 변화였다.

밧단 아람에서 라반 밑에서 살고 있던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지시하셨다. 아버지의 집, 아버지가 살고 있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그는 도망갔던 길을 거슬러 내려가야 했다.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도망간 여정은 그의 조부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가나안으로 내려왔던 길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밧단 아람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기 이전에 살았던 곳이었다.
또한 그가 도망 중에 잠시 거처했던 벧엘은 아브라함이 머물러 하나님께 예배했던 곳이었다.
그의 이 모든 여정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예비된 것이었다. 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을 만나주셨던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주시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셨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다시 에서와 대면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길을 떠나기는 했지만 에서를 대면할 용기가 없었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해결되지 않은 감정의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기 마련이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위로하고 담대함을 주시기 원했던 것 같다. 마하나임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난다. 마치 그의 밧단 아람으로의 도망 길에서 천사들이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여주셨을 때처럼.
그의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와 섭리가 있었고 야곱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야곱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축복은 바로 이 부분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당시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의 삶에 목적이라기 보다는 수단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평안하게 해주는 한에 있어서만 의미가 있었다. 하나님은 원했지만 연단은 싫었다. 야곱이 평안할 수 있었던 기간은 에서가 사백 명을 데리고 그에게로 온다는 사신들의 전언을 들었을 직전까지였다 (창 32:6).

완전하지 못한 정보가 주어진 가운데 미리 떨며 방황하는 야곱의 모습은 그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수준을 보여준다. 야곱은 에서가 자신을 미워하고 있다는 선입견이 있었고 따라서 에서가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것은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해 버렸던 것이다.

두렵고 답답한 마음에 야곱은 자신이 낼 수 있는 꾀를 다 동원한다. 먼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리들을 두 떼로 나눈다. 한 떼가 공격받으면 다른 한 떼를 데리고 피할 생각에서 이다.
위기의 순간에 닥치면 우리의 우선 순위가 무엇인지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나서야 야곱은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도의 내용을 보면 아주 훌륭한 내용이다. 자신에게 주신 언약을 기억하여 아뢰고 또 그 동안의 인도하심을 기억하며 또 앞으로의 위험에서 구해달라는 내용이다. 이 기도의 내용을 보면 야곱이 훌륭한 믿음의 소유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 기도 직후의 야곱의 모습을 보면 그가 하나님이 구해 주실 것에 대해 신뢰하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에서에게 보낼 선물을 준비하되 여러 떼로 나누어서 보냈다. 그것을 통해서 여러 번에 걸쳐 형의 마음을 풀어보려고 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야곱의 방식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아울러 자신이 할 최선을 찾는 행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야곱의 이러한 방책은 그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 분인지에 대한 이해가 없고 또 하나님이 이 일 가운데 정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하나님을 의지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컸다.

야곱은 문득 밤에 일어나 가족들을 깨우고 짐을 챙겨서 얍복 강을 건너게 한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예물을 보내놓고 밤을 맞이한 야곱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방책을 세워도 그것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두려워하던 그는 일단 무리들을 버려두고 가족들을 강을 건너게 했다. 불안이 엄습하는 가운데 재산은 포기하더라도 가족들만큼은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지리에 대한 감각이 필요하다. 얍복 강은 요단 강의 한 지류로써 동서로 흐르고 있었다. 당시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북쪽에서부터 요단 강줄기를 따라 내려왔고 이미 얍복 강 남쪽 지역에 있었다.
그가 지나온 마하나임은 얍복 강 남쪽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가나안은 남서쪽에 있었다. 그리고 남동쪽인 에돔 지역에서 에서가 북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얍복 강 남쪽에서 강을 건넌다는 것은 북쪽으로의 후퇴를 의미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행위였다. 야곱은 불안해져서 하나님을 더 이상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가족을 건네놓고 야곱은 홀로 남았다. 위기의 순간에는 결국 혼자일 뿐이다. 가장 외로운 모습으로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현실을 극복하려고 애쓰고 또 애쓰지만 해결할 수 없어 결국 홀로 남았다.

그런데 왜 가족과 함께 있지 않았을까? 혹 야곱은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홀로 남았을까? 그랬다면 그는 자신의 하인들과 같이 남았어야 했다.
어쩌면 야곱은 혼자라도 살기를 원했을 수도 있다. 위기가 닥치자 그의 우선 순위가 더욱 분명해졌다. 가족까지 저버리는 가장 이기적인 모습으로 야곱은 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최후에 남은 것은 바로 “나”였다. 이 “나”는 하나님과 대척적인 방향에 서 있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밤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한다. 그 어떤 사람은 하나님임이 밝혀졌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결국 하나님 앞에 홀로 서게 된다. 광야 속의 광야다. 내 속에 숨은 자아를 대면하고 또 하나님을 대면하는 자리이다.

그런데 왜 서로 씨름을 했을까? 어떤 이는 이 장면을 보면서 야곱이 기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어떤 이는 야곱이 하나님과 기도의 씨름을 한 것이고 결국 목숨을 건 기도로 하나님의 축복을 얻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열심히 기도해서 결국 하나님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굴복시키고 자신이 얻고자 한 축복을 완성하는 것이 옳다는 이해이다.
과연 그럴까?
열심히 떼를 써야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고 또 위험에서 구해주시는 것일까?

기도라는 상징으로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은 실제 상황이었다. 그것은 씨름 후 아침이 되어 야곱이 다리를 절게 되었던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굳이 야곱과 씨름을 하고 있었을까?

이것은 야곱의 이기적인 지향과 하나님의 사명이 부딪히는 상황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남쪽으로 가라. 네 아버지 집으로.”
야곱은 에서를 만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내려왔던 길을 거슬러 북쪽으로 피하려 했다. 하나님은 그를 붙잡았다.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려고 했다.
도망가려는 야곱을 굴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시도와 현실의 두려움 앞에 과거로 돌아가려는 야곱의 자아의 몸부림이 한 지향이었고, 야곱이 도피하려는 틀어진 관계라는 현실을 직면하도록 이끄는 하나님의 시도가 또 다른 지향이었다.
이 싸움은 현실에 기초할 수 밖에 없는 믿음 없는 자아와 하나님의 씨름이었다.  도망가려는 야곱과 그것을 친히 말리시는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이 이길 수 없는 것 같이 보였다.
왜일까? 우리 자아가 항복될 때까지는 하나님이 일하실 수 없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과연 몇이나 될까?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다. 강제로 우리 안에 들어오려 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고집을 부리는 동안 하나님은 기다리실 수 밖에 없다. 둘째 아들이 유산을 달라고 했을 때 떠나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처럼.

결국 하나님은 야곱의 엉덩이 뼈를 어긋나게 하는 방법을 쓰셨다. 씨름에서 뼈를 위골시키는 것은 반칙처럼 보인다. 하나님께서 이기려다 안되니까 야곱을 상대로 반칙을 쓰신 것일까?
아니다.

유목민에게 있어서 이동성은 생명과 같다. 적이 쳐들어 와도 일단 도망가면 살 수 있다. 야곱은 에서에게 힘으로 이길 수 없으니까 도망을 생각했다.
하나님은 그가 도망하기 위한 수단을 건드리셨다. 야곱이 끝까지 믿었던 것은 두 다리였다. 그 중에 하나를 치신 것이다. 극약 처방이었다. 야곱의 꾀는 완전히 꺾였고 최악의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그리고는 하나님은 이제 떠나가시겠다고 했다. ‘네가 너를 그토록 의지한다면, 네가 그렇게 믿을만한 존재라면, 그래 이제 네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보겠다’는 것이다.
이제는 야곱이 하나님을 붙잡는다.
“내게 복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부연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 노력으로는 이 상황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당신이 이겼습니다.  당신의 축복만이 나의 유일한 탈출구임을 인정합니다.  내 인간적인 모든 노력을 포기합니다.  당신의 방법이 나를 지배할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와 아버지께 고백한다.
“나를 아버지 집의 품꾼으로 여겨주세요.” 전에는 자기를 너무 사랑했기에 아버지께 순복하기 싫어서 떠나간 아들이 이제 제 발로 찾아왔다. “아버지… 당신이 필요합니다.”

야곱은 싸움의 과정 중에 자신이 대결하고 있는 상대가 하나님인줄 알았다.
어떻게?
싸움의 방향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그가 가려는 방향이 하나님이 가라 하신 방향과 반대였다. 하나님의 방향으로 당기는 그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이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복에 대해서 언급하기 전에 야곱에게 물으신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너라는 사람이 그 동안 추구해 온 것이 무엇이었니, 네게 최고의 우선 순위가 무엇이었니’라고 물으시는 것이다.
야곱은 대답한다. “야곱… 즉 속이는 자였습니다. 경쟁하는 자였습니다. 나만을 위해서 살아온 삶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제는 네가 바뀔 것이다.”
야곱이 바뀌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 자아가 항복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신다.
“네게 새 이름을 주겠다. 이스라엘이라고 해라. 네가 하나님과 사람과 더불어 싸워 이겼다.”
이 말씀은 야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야곱의 자아와 하나님 사이의 두 지향 사이에 야곱이 있었다. 야곱은 이 싸움에서 결국 승리한 것이다. 야곱이 하나님을 이긴 것이라기 보다는 내적 싸움을 이긴 것이다.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은 명칭이 가진 뜻대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자아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충돌을 겪는다.
이 충돌의 역사는 바로 언약 백성으로 만들어져 가는 과정을 함의한다. 또한 우리의 영적 성장 과정을 압축한 하나의 모본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야곱의 상황을 바꿔주시지 않았다. 대신 야곱을 바꾸어 주셨다. 자아를 내려놓을 수있도록 이끌어 주셨다. 아침 해가 돋았을 때 야곱은 에서를 만날 용기가 솟았다. 야곱이 변했다는 사실을 에서를 대면해서 한 그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형님을 뵈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 같습니다” (창 33: 10).

야곱의 마음이 바뀌니까 평생의 경쟁자이자 숙적이었던 에서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상황이 아닌 야곱 자신이 바뀐 것이다. 실은 야곱이 두려워했던 이유는 에서에 대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이미지 때문이었다.
전에 형의 것을 빼앗으려던 야곱이 이제는 자신이 가진 것을 형과 진심으로 나누려고 했다.  전에는 자신을 보전시켜주는 대가로 예물을 주려고 했다.  
대가를 바라는 선심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바뀌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형과 나누려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자신이 바뀌고 에서와의 관계가 해결되자 에서와 다시 헤어지고는 다시는 야곱의 삶에서 에서로 인한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에서는 하나님의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의 ‘야곱 조련사’로써의 역할이 끝났기 때문이다.

축복과 광야의 연단은 같이 가는 패키지였다. 내가 축복의 통로가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내 삶 가운데 연단의 사람을 붙여주심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바뀌는데 있다. 힘든 사람을 붙여주시는 이유이다.

어느 집회 가운데 문득 누가 어떻게 은혜를 받고 변화되는가에 관심이 있던 나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나의 관심은 너다.  네가 바뀌어야 한다.”

MIU에서 사역하면서 상황이나 관계의 어려움이 있었다. 기도하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왔다.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네가 바뀌지 않기 때문에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란다.”  
야곱이 하나님의 복을 구했다. 하지만 그에게 진짜 필요한 복이 무엇인지 그가 이해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에게 필요한 복은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과 타이밍에 주어졌다.
하나님의 나의 삶에 대한 주권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내가 받을 첫 번째 복이다.


김승예

2008.01.11 12:09:21

기다리던 연재가 시작되었네요^^ 감사함으로 깊은 깨달음 얻기를 기대하며 읽을게요...

김 태웅

2008.01.12 06:39:56

새로운 성경의 해석 너무 맘에 와 닿습니다..
깨닫는 바가 정말 크네요..감사합니다.

사랑은

2008.02.29 00:45:38

07년 12월 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던 교회 지체 중 몇 사람으로 인한 사소한 갈등으로인한 심한 스트레스로인해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며 이제는 하나님 도와달라고 두 손 들고 나오며 2월이 가기전에 이 모든 문제가 제 안에서 해결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는데(왜냐하면 3월부터는 복학해서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하기에 이런 복잡한 심정으로 계속 가다가는 드러 눕게 생겼기때문에 마음이 급해 2월 마지막날까지로 응답해달라고 기도했죠)
세상에...
이 글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합당하신 하나님, 놀라우신 하나님, 전지 전능하신 나의 주!
늘 듣던 말씀인데도 오늘처럼 새로울 수가 있을까요?
가시 같던 자매가 며칠 전 부터는 이해가 되고 사랑으로 덮을 수 있을것만 같더니 이제는 제 허물도 보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져요
이제 그 자매 만나면 사랑한다고 말해 줄래요
맛난 것도 먹으면서요
아~ 하나님은 정말 사랑이셔요
감사합니다 하나님, 선교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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