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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서는 18세기 이후에 전개된 개신교의 몽골 선교 노력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동방 교회의 선교의 전통이 18세기 이후의 개신교 선교에 어떻게 연결되어 가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 이후의 개신교 선교

부리야트 미션

몽골 제국의 분열과 쇠퇴 이후 동방 교회는 15세기를 기점으로 급속도로 쇠퇴한다. 종교 개혁 이후 유럽인에 의한 몽골족 선교는 모라비안들에 의해서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모라비안들은 최초로 러시아 제국령내의 토르구트 부족, 칼묵 부족, 그리고 부리야트 부족민을 상대로 전도하기 시작했다.  모라비안들은 그후  러시아 정교회의 간섭 등으로 전도의 문이 막히자 티벳을 경유해서 전도의 길을 뚫을 것을 모색하기도 했다.  최초로 신약 성경이 부리야트 몽골어로 번역된 것도 이들의 공로이다.

LMS 미션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LMS)는 동아시아 선교에 중요한 획을 그은 선교 단체이다.  대동강변에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를 비롯, 다수의 조선과 중국에 보냄을 받은 선교사들이 이 단체 출신이었다.  런던 선교회는 부리야트 몽골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의 이르쿠츠크 주변에 교회 공동체 세우는 노력을 기울인다.  아울러 모라비안 미션에 의해서 시작된 브리야트 성경 번역을 마무리 한다. 하지만 이 성경은 문어체 번역이었기 때문에 문자를 모르는 유목민들이 성경에 접근하기에는 어려운 현실적 제약이 여전히 존재했다.  

런던 선교회 파송 선교사들은 주로 학교 교육과 문서 선교를 통해 전도의 문을 두드리는 전략을 사용했다.  서구적인 모델의 아카데미를 열어서 현지인들을 서구적인 교육으로 양육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앙 교육 보다는 세속 교육에 초점을 두게 되었고 결신자를 얻는데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선교는 선교사들이 장거리를 여행해서 장시간을 머물며 노력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열매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목 지역이었고 접근이 어려웠던 몽골 지역 선교를 위해 주로 중국이나 러시아에 거점을 세우고 그곳을 통해 선교하는 정책이 사용되었다.  런던 선교회의 선교사 중에서는 중국 내에 들어와 있는 몽골 라마교도들을 전도하는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 있었다.  

그 시기 몽골 선교사 중 가장 잘 알려진 영국 선교사 제임스 길모어에 의해 본격적으로 몽골 초원 지대에 순회 의료선교가 시작된다.  그 자신 의사가 아니었지만 그는 중국에 거주하며 의료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시간을 많이 들였다.  그의 의학 지식은 선교를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현재의 내몽골 지역에 거점을 두면서 매년 여름 우르가 (현재의 울란바아타르) 지역까지 순회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전도용지를 나누어주고 유목민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의 전도 열정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감동과 도전을 주었고 그로 인해 그를 따라 몽골 선교에 헌신하는 선교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길모어에 의해 몽골인에 대한 의료 선교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의 후계자 토마스 카크레인은 중국에서 의료 선교하며 몽골인들과도 관계를 맺으며 사역한다.  특별히 선교사들 사이의 교단적 편향을 비판하고 하나의 연합 선교를 주창하는데 그의 연합 사역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북경 연합 의과 대학(Peking Union Medical College)이다.

의료 시술은 유목민 전도에 있어서 중요한 도구가 되어 왔다.  티벳 불교가 몽골에서 16세기 이후에 확산된 배경에는 그들이 가지고 들어온 티벳 의술이 있었다.  그들이 무당들이 고치지 못하는 병들을 고치면서 그들의 능력과 그들의 신앙이 가진 힘을 증거할 수 있었다.  이슬람도 마찬가지였다.  위험요소가 많이 있는 초원 지역에서 살고있던 유목민들은 그들이 의존할 수 있는 특별한 의술을 가지지 못했으며 병고침을 위해서는 전적으로 무당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의술을 통해 병고침이 일어날 때 유목민들은 병고치는 사람의 말을 신뢰하고 특별하게 대했다.  따라서 의료 기술은 유목민 전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부까지의 개신교 선교 활동

19 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이 지역 선교사들 가운데 북유럽 출신의 선교사가 두드러지는 것이 이 시기의 개신교 몽골 선교의 한 두드러진 특징이다.  스웨던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위치한 북유럽의 개신교 국가 출신의 선교사들이 상대적으로 몽골 선교에 관심과 열정을 보이고 몽골을 찾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위도가 높은 지역의 추운 지역 출신의 선교사들이 상대적으로 몽골 고원의 추위에 잘 적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선교사들은 1890년대에 들어 이미 현재의 울란바아타르 지역에서 병원을 세우며 선교를 시작했다.  하지만 1924년 이후 러시아인의 유입과 공산 혁명으로 인해 선교사들은 외몽골 지역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내몽골 지역을 중심으로 사역하게 된다.  

정착 지역에서와는 달리 지속적으로 유목하며 계절 단위로 이동하는 유목민을 상대로 전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몽골과 같이 바다를 끼고 있지 않은 내륙 지역, 거의 개발되지 않은 채 고립된 초원, 사막, 산악지대를 끼고 선교 활동을 한다는 것이 선교사에게 주는 부담은 매우 컸다.  공산화 이전까지의 몽골 지역에서의 유목민 선교는 주로 세가지 양태로 대별할 수 있다.  

첫째 유형은 유목민과 함께 이동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선교사 스스로가 게르를 치거나 유목 귀족의 캠프를 따라 함께 이동하면서 복음을 전하거나 의료 시혜를 베풀며 전도하는 것이다.  제임스 길모어는 이 영역의 전도에 있어서 가장 잘 알려진 예이다.  한 가지 문제는 이 방법을 통해서는 교회가 개척되기 어려웠다.  물론 유목민 가운데 결신자들이 생겨난 것으로 보고되지만 실제로 이 결신자들이 뿌리내리며 지속적으로 신앙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토대를 이루기 어려웠다.

두번째 유형은 초원 지대에 거점을 두고 전도하는 것이다.  지역을 정해서 거주용 건물, 학교, 병원, 부속 시설 등을 세우고 이곳을 찾는 몽골인을 대상으로 전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점 선교는 공산 혁명 이전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세번째 유형은 몽골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국에 선교 센터를 세우고 종교적인 순례, 무역, 교류 등을 위해 방문하는 몽골인들 또는 이주해 와서 살고있는 몽골인을 상대로 전도하는 것이다.  주로 섬서, 감숙, 신강 등의 중국 서북 지역, 북경, 내몽골의 도시들, 이르쿠츠크나 브리야트 지역의 선교사들은 몽골인들과 접촉하게 되면서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선교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몽골 지역 내에 거점을 가지지 않았지만 이들 주변국 선교사들은 몽골인 선교와 직간접으로 연결되게 되었다.  첫번째 유형의 이주 선교사들도 주기적으로 주변국 선교 기지를 자신의 베이스 캠프로 활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네번째 유형은 내몽골 지역 중심으로 개간된 식민지를 건설하는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교회를 세우고 신앙 공동체를 만들고 보다 효과적인 양육을 하려는 시도이다.  주로 카톨릭에서 시도한 방법이었고 개신교 선교사 중에서도 이러한 모델을 시도한 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정착촌 건설을 통한 선교 방법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당시 유목 문화가 가진 정착촌 확산에 대한 불안과 거부감은 서구 선교사들의 예상보다 컸다.  실제로 주로 정착촌에 진출한 사람들은 중국인이었다.  비록 몽골 내지에 세워진 정착촌이지만 이곳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이 이곳에 진출한 중국인이었다.  중국 북부의 카톨릭 신자들이 만주 정권의 박해를 피해 내몽골의 카톨릭 정착촌으로 이주해 오기도 했다.  이들은 건설된 정착촌을 기반으로 몽골 지역에 진출하려 했고 중국인과 몽골인 사이의 갈등은 골이 깊은 것이었다.  이것이 기독교 정착촌이 공격을 받고 주변 몽골인의 배척을 받는 한 요인이 되었다.  정착촌에 거주하던 선교사들 가운데 보수적인 유목 귀족들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기도 했다.

보통 몽골 지역에서는 순교자가 거의 없었다는 통념과는 달리 실제로 많은 순교가 발생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청말의 의화단의 난을 계기로 지금의 내몽골에 속해 있는 오르도스 지역의 천주교도들이 대규모로 학살당한 사건이다.  당시 천주교가 주로 초원 지역을 개척해서 정착촌을 건설하며 천주교 중심 지역을 확장시키는 방법으로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던 경향에 대해  외국인의 진출과 정착촌 건설, 그로 인한 목초지 잠식에 불만을 가진 보수세력들의 공격으로 인해 다수의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이 살해당했고 정착촌은 약탈, 파괴되기도 했다.  

몽골에서의 공산 혁명 그리고 1948년 중국 공산화가 몽골 선교의 끝은 아니었다.  다수의 몽골 기독교인들은 홍콩과 대만으로 피난하여 그곳에 몽골인 교회를 세운다.  여전히 몽골인 디아스포라들을 중심으로 몽골인 교회가 존속했다. 내몽골과 외몽골에서 활동하던 천주교 신부들의 기록에 따르면 공산 혁명 이후에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내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지킨 사람들이 있어왔다고 한다.   즉 신앙의 그루터기들이 몽골 내에 존재했던 것이다.

이러한 면면히 흐르는 몽골에서의 기독교 역사 토대의 기초 위에 1990년대의 몽골 민주화에 힘입어 현재의 급성장하는 몽골 교회가 생겨난다.  몽골 선교는 1992년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6세기 이래로 지속적으로 하나님은 이 민족을 불러오셨고 또 세계 선교를 위해 사용해 오셨던 것이다.  따라서 1990년대와 2000년대의 교회 부흥은 이러한 1400 여년간의 몽골의 기독교 역사라는 도도한 흐름의 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김영수

2007.07.09 14:09:56

몽골이 아시아 지역에서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역활을 하고 있었네요!
물론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복음이 뿌려지고 있었겠지만......

그런데,하나 궁금한 점이 생기네요!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중 고등학교 때 국사라는 과목을 배우며 한반도의 역사 가운데 각나라의 흥망성쇠에 따라 정치적 목적이든 아니든 국교로 내세웠던 종교가 있었던 것 같은데요.

현 지금의 몽골 국민들이 학교수업을 통해 역사를 배우고 있다면 지금 선교사님이 쓰신 윗글이나 "네스토리안을 찾아서"라는 글에서 말하고 있듯, 자신들 나라의 종교적 뿌리가 기독교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는 듯 한데요.

아무리 기독교가 역사속에서 쇠퇴하며 흐릿해 졌다 하더라도 역사를 배우고 있다면 (제가 잘몰라서 그렇겠지만) 몽골이 라마교를 국교로 정하고 국가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직 교육수준이 낮아서 그런건가요?

학술적으로 많은 연구를 하신 내용 중 극히 일부분을 읽은 것이기에 또, 전체적인 지도를 아직 모르기에 그저 단순한 궁금증에서 쓴 글이니 신경 안쓰셔도 됩니다. ^^

선교사님이 이렇게 연구하신 글을 홈피에 올리고 계시니 언젠가 궁금증이 플리겠죠~! ^^

글 잘읽었습니다. 흥미롭고 재밌게 읽고 있어요~^^

이용규

2007.07.12 12:42:13

지금 세상과 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생각과 이론 가운데 잘못된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진화론과 인본주의적 세계관을 비롯해서 수많은 비진리가 세상을 끌어가고 있지요.
몽골 역사에서의 기독교적 뿌리에 대해서 사료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증거들이 있지만 몽골의 70년간의 사회주의와 3세기간 지속된 라마 불교의 전통은 그것을 인정하려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곧 바뀔 것에 대해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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