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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교에 대한 반성

선교사가 일반 교회의 담임 목회자와 궁극적으로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 선교사 중에는 목사 안수를 받은 자들도 많고 또 교회 개척 사역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둘은 비슷한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목회자는 교회를 세우고 확장시키는 것을 목표로 사역한다면 선교사는 물려주는 것을 전제로 사역을 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한국인 선교사에게 있어서 자칫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음을 본다.
한국에서 목회 경험을 가지고 오신 분들은 한국에서의 담임 목회 패러다임을 가지고 와서 교회 개척을 하는 경우를 본다. 이것이 선교에 있어서 방해 요소로 작용함을 여러 방면에서 목격해 왔다.

물론 내가 섬기는 몽골에서의 선교사들을 보면 참으로 귀한 분들이 많다. 내가 느끼기에 몽골이 복을 받은 것 중 하나는 귀한 선교 사역자들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이다. 그 분들의 섬김을 보면 옷깃이 여며지는 숙연함을 느끼게 하는 귀한 분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에서의 한국인 선교는 모든 면에서 성공적이라고 보기에 어렵다. 최근 보고에 의하면 울란바아타르 내에 있는 교회 중 절반 정도가 한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개척된 것인데 최근 한국인 선교사가 섬기는 교회가 성장이 멈추고 정체되는 현상이 두드러진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한국인 선교사의 교회 사역은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몽골 교회에 더 이상 유익을 끼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작년 여름 한국의 몽골 선교가 15주년을 맞이하게 되어 한인 선교사회 주관으로 선교 기념집을 출간했다. 그 보고서에는 한국인 선교사가 본 몽골 선교와 몽골인 목회자나 외국인 선교사가 본 한국 선교사의 몽골 선교에 대한 앙케이트 조사가 실렸다.
그 자료에 보면 한국인 선교사가 본 몽골 선교는 90 퍼센트 이상이 긍정적이라고 평가되어 있다. 반면 몽골인 목회자가 본 한국 선교사의 몽골 선교는 긍정과 부정이 교차했다. 좋은 면도 있지만 부정적으로 비치는 부분도 있다는 반응이었다.

내가 보기에 가장 큰 문제는 교회 사역에 있어서 섬김의 리더십이 부족해서 현지인에게 덕을 끼치지 못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자칫 현지인 사역자들을 고용인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마치 한국에서의 담임 목회자와 부목회자와의 관계가 선교지에 그대로 전이된 것으로 보이는 경우이다. 문제는 이것이 힘있는 외국인 선교사의 횡포로 비치고 오해를 부르기 쉽다는데 있다. 특히 권위와 자금력을 가지고 민족적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으로 잘못 비쳐지면 이 오해를 풀기가 쉽지 않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가슴 아픈 이야기 하나를 해야겠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예언 사역자 마크 비셔가 몽골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몽골의 교인들을 대상으로도 큰 집회에서 말씀을 전했는데 어느 집회 중 문득 한국인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예언의 말씀을 전했다.  
한국인 선교사들의 희생과 수고와 대한 감사의 말과 함께 애정 어린 그러나 매우 뼈아픈 지적을 한가지 했다. “그러나 당신들에게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이 있는데 한국의 교회를 심으려 하지 말라”라는 말이었다.
내가 마음 아팠던 것은 그 때 앉아있던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온 것이다. 몽골인들은 주변 민족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많고 경제적으로 침체시기를 겪었기 때문에 민족적 자긍심과 동시에 열등감이 강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 선교사의 문제점이 마크 비셔의 입을 통해 지적되었을 때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이다. 몽골에서 유난히 귀한 선교사분들이 와서 귀한 헌신을 하지만 이들의 수고가 문화적인 굴절 때문에 달리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은 좋은 부모는 아이들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아무리 부모 자신이 잘 하려고 해도 아이들이 부모에 대하여 불만이 있음을 보는 경우가 많다. 이 때 좋은 부모는 자신이 옳음을 증명하려거나 아이의 철없음을 탓하기 보다는 아이들의 눈에 관심을 가지게 마련이다.
좋은 선생님은 내가 어떻게 가르치나 보다는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관심 두기 마련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교사는 내 기준으로 선교 대상을 판단하면 안되고 그들의 눈으로 자신을 살피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들의 상황과 문화에 대해 깊이 이해하려는 작업과 또 상대방의 심정을 살피고 배려하는 노력이 선교 활동 내내 지속될 필요가 있다.

현재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를 세계 곳곳에 파송하고 선교에 있어서 전세계적으로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자인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점이 있는데 한국 선교사들이 외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고 대부분 자기 기준으로 현지인과 문화를 평가하고 자신의 교회 경험과 문화적 가치를 피선교인들에게 요구하는 경우가 본의 아니게 생길 수 있다.
특히 제삼세계에서 한국인은 힘과 재정적 능력이 있는 자들로 비쳐지기 때문에 사람들의 일시적 순응은 얻을지 몰라도 이러한 방식으로는 한국 선교사들의 희생 어린 헌신이 오히려 문화적 거부감과 민족적 굴욕감을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이 극복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크게 네 가지를 제언하고 싶다. 첫번째는 선교사 자신의 리더십의 방식이 가질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
한국 선교사들은 자칫 한국에서 자신이 배워온 목회 방식이나 제도가 타문화권에서도 적용되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선교사가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거나 타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 한국적인 것이 가장 좋은 것이고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한국적인 모델이 다 성서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에서의 목회 상황을 보건대 담임 목회자와 부목회자의 관계에서 드러나듯이 섬김의 리더십 모델을 찾기 어렵다. 보통 목회자 선교사 가운데는 한국적 목회 패러다임을 가지고 선교지로 가지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본대로 하기 마련이니까.
한국 선교사는 비교적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한국 교회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비치기 때문에 선교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제삼 세계 선교지에서는 힘이 있는 존재로 비쳐지기 쉽다.
이 경우 권위 체계에 대한 이해가 생기지 않은 교인들에게 한국식 권위 체계를 이식하고 그 정점에 선교사가 있음으로 해서 섬김의 본을 보이기 어려워지게 된다.

몽골인 목회자들이 한국 선교사들에게 느끼는 어려운 부분은 한국 선교사들이 ‘화를 잘 낸다’ 또는 ‘어떤 때는 융통성이 없이 완고하고 또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무르게 반응하는 것으로 보여 원칙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물론 문화적인 차이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 심층적인 배후에는 결국 한국 선교사들이 힘있는 자로 여겨지기 때문에 나타나는 어려움이다.  

특별히 선교사들이 개성이 강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기 방식을 고집하거나 자신이 전체를 좌지우지하려 하며 위에서 조정하려는 모습을 보인다면 밑의 사람들은 힘있어 보이는 자에게 순종하는 척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가짜 순종을 낳을 뿐 삶에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그리고 선교사와 자신 간에 심정적인 거리를 두게 마련이다.

한국의 파송 교회로부터 파송 선교사가 한국 교회의 부목회자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그 경우 선교사의 역할은 한국 파송 교회의 방침을 실행하는 지부로 이해될 수 있다. 선교사의 교회 중에는 파송 교회의 이름을 딴 교회도 있는데 마치 파송 교회의 몽골 지교회로 인식되기도 한다.
만약 선교사가 파송 교회와 상호 신뢰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경우, 파송 교회가 자신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서 두려움을 가지게 되면 문제가 된다. 현지인이 섬김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파송 교회가 섬김의 대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때로는 실적 보고에 부담을 느끼게 되고 사역 위주의 삶을 살게 된다.
아래로부터의 자발성에 의존하는 선교가 아닌 위에서 끌고 가는 선교가 되기 쉽다. 나는 좋은 파송 교회를 만났고 또 재정 부분에 있어서 묶이지 않는 자유함을 초기부터 가졌기 때문에 사역에 있어서 늘 하나님의 뜻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저 하나님이 쉬라 하시면 언제든 쉴 수 있고 놓으라 하실 때 놓을 수 있는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어서 감사한다.

두번째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대우받고자 하는 마음에 대해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느 한국인 선교사에게 독일인 선교사가 영어로 그 선교사의 이름을 불렀다. 영어에서는 이름을 부르는 것은 자신이 상대방에게 격의를 두지 않고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그 한국인 선교사분이 격노했다고 한다. 앞에 “패스터 킴”이라든지 “미셔너리 킴”이라는 식으로 호칭을 붙이지 않고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 이유였다.
문화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우리 문화가 가지는 호칭에 대한 민감성은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어느 목회자에게 형제님이라는 호칭을 썼다가 노여움을 사는 경우를 흔히 본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느 목사님이 전문인 사역자 한 분을 ‘집사’로 호칭했다. 이에 대해 의도적으로 자신을 깎아 내리는 처사라며 노여워하는 경우가 있었다.
누구의 문제일까? 만약 이 경우가 문제가 된다면 어쩌면 두 사람 모두에게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노여워하는 쪽에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일 수 있다. 자신의 정체성이나 자존감이 호칭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선교지에 있다 보면 목회자 선교사와 전문인 선교사 사이에 불필요한 거리감을 가지는 경우를 본다. 둘 다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 가면 좋건만 서열과 우위를 따지기 때문에 서로 존중하지 못해서 불편한 관계를 가지는 경우다. 몽골에서는 이러한 문제는 별로 없고 서로간의 협력이 잘 이루어지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불편함이 미묘하게나마 작용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몽골에서 사역하는 어느 목회자 선교사 한 분이 전문인 선교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한국 돌아가도 최소한 어느 교회 부목회자로 갈 수 있겠지. 당신들은 여기서 있는 동안은 사역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이곳에서 돌아가서 무슨 대안이 있는가?”

실은 전문인 선교사들의 경우 목회자 선교사들에 비해 더 열악한 환경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나름의 애로점이 있어 보인다. 한국 교회의 인식이 뒤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평신도 선교사들은 목회자 선교사에 비해 보조적인 존재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안식년으로 쉬는 기간 교회가 후원하거나 설교를 부탁하는 경우가 아무래도 목회자 선교사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제약되기 쉽다. 이미 전문 직종을 떠나 선교지로 들어온 지 오래된 상황에 있다 보니 선교지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의 대책이 준비되지 못한 경우도 많이 보게 된다.
이러한 데서 오는 부담 때문인지 한국 출신의 전문인 선교사들은 안식년에 나가서 신학교로 들어가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외국 선교사 중에는 우려를 표하면서 한국 선교가 발전하기 보다는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일침을 놓는다.

물론 목회자 선교사가 가지는 고유한 영역이 있고 이 부분은 선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이 부분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목회자 선교사와 전문인 선교사가 서로 연합하며 사역을 서로 보완할 수 있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누가 더 우위에 있으며 더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하는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가장 중요한 섬김과 연합의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가 가진 교권주의의 문제가 우리가 섬겨야 할 민족들의 교회 가운데 재연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교회 안에 반성과 갱신을 위한 노력이 요구된다.

세번째는 한국식 교회 개척 방식의 문제점이다. 이 부분은 필자 자신도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기에 조심스럽기도 하다. 자칫 비판의 태도로 비쳐질 수 있고 이상주의적인 모습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한국인 선교사의 경우, 교회를 개척하면서 교회 건물을 우선적으로 짓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 교회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한국 같은 정주 문화에서는 건물이 강조된다. 또 땅값 비싼 한국에 살다 보면 땅이나 건물을 확보하지 못하면 안정적이라고 느끼지 못한다. 건물은 물론 무척 중요하고 건물이 없을 때 느껴지는 제약은 상상 외로 클 수가 있다. 교회 건물이 없이 교회가 자립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단 우리의 문제는 교회를 크게 지으면 사람으로 채워진다는 인식이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 교회라고 하면 교회 건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의외로 보편적이다. 교회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총칭이건만 우리는 교회라고 하면 건물을 지칭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또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는데 그것도 잘못된 개념이다. 신약에서의 성전은 주님을 주로 고백하는 백성들이다. 건물이 아니다.
한국 교회의 선교사 후원 현황을 보면 압도적으로 목회자 선교사를 선호한다. 목회자 선교사를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는 선교지에서의 교회 개척 사역을 가장 중요한 사역이라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 개척 사역은 너무도 중요한 사역이고 한국인 선교사가 가장 잘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문제는 교회 개척 방식이 주로 한국의 교회 성장 방식을 따르는 경우에 생길 수 있다. 물론 좋은 성공 사례도 있을 수 있지만 문제는 성장 위주의 사역을 하다가 자립화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많다. 한국인 선교사가 쉽게 교회를 이양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가 일단 외부 지원을 통해서 교회가 시작되고 운영된 경우 자립이 어렵다게 된다.

내게도 지방에 교회를 지으려면 어느 정도의 비용이 드는지 묻는 문의가 온다. 헌금해서 교회를 세우기를 원하는 경우다. 나는 이 분들이 건물에 대한 애정을 가지는 것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굳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교회는 건물만이 아닙니다. 교회는 주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물론 건물을 위해 헌금하려는 마음은 너무나 귀하지만 몽골에서 교회 건물을 만들어 주더라도 훈련이 안되면 이 분들은 선교사가 떠난 후 건물을 팔아버릴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가 헌금하는 훈련이 되지 않으면 교회를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헌금의 귀함을 알기에 그 헌금이 사용되기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 말씀 드리는 겁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그 다음에는 연락이 없는 경우가 많다. 충분히 그 마음에 공감이 간다. 한국적 교회관의 영향 하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단 한국 교회의 수준이 높아지지 않으면 한국 선교의 수준이 한 단계 높아지기가 어려움을 본다. 내가 가끔씩이라도 한국의 교회를 방문해서 말씀 전하는 것도 사명이라고 여기는 이유다.

선교사의 사역보고의 짐

네번째는 관계보다는 사역 중심의 태도이다. 나는 중앙 아시아 지역에 있는 선교사 분들을 선교 컨퍼런스에서 강의로 섬겨드릴 기회가 많았다. 내가 관심있는 부분이 선교 역사 내지는 아시아 기독교 역사다 보니 선교사 분들이 자신의 사역지와 사역 방향에 대해 보다 넓은 시각에서 관조할 수 있도록 돕는 강의를 위해 초청받는 경우가 많았다.

초청받아 가면 다양한 선교사님들이 서로 소개할 기회가 있는데 주로 당신이 계신 지역과 사역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분이 하시는 사역이 그 분을 기억하는 수단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많이 보았다. 나는 가능하면 선교사 분들을 대할 때 그 분들이 무슨 사역을 하는지를 묻지 않는다. 그저 그 분이 하나님을 어떻게 누리고 만나고 계신지에 대해서 질문하고 관심 갖곤 한다.

우리는 보통 자연스럽게 선교사가 어떤 일을 하는가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분이 얼마나 큰 사역을 하고 얼마나 중요한 사역을 하는가로 자칫 그 분을 평가하는 경향에 빠지기 쉽다. 그것이 선교사들에게도 스트레스가 된다.
다행히 나는 사역 시작부터 선교 보고할 대상이 없고 또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선교 후원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교회의 집중 후원을 받는 목회자 사역자 분들의 경우 그렇지 못한 경우를 종종 접하게 된다.

보통 파송 교회에서는 선교사가 어떤 사역을 어떻게 하는지에 지나친 관심을 가지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것이 선교사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기에 파송 교회에서 선교지를 방문한다고 하면 긴장하는 경우를 본다. 파송 교회 선교부가 조력자라기 보다는 조사 담당관 같은 인상을 주는 경우 때문이다.

선교사 중에는 때로는 자신의 사역을 과장하고 싶은 유혹에 약해질 수도 있음을 본다. 나는 선교사가 얼마나 사역 보고에 자유로울 수 있는가가 그 선교사가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이 있을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인이 됨을 보게 된다. 선교사가 얼마나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건강하게 롱런하는가는 이것과 관련이 크다.

파송 교회가 이 부분을 도와줄 필요가 있다. 물론 선교지에서 물의를 일으키는 선교사도 없지는 않고 그로 인해 감독 기능 강화의 필요를 말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선교사가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는가에 관심갖기 이전에 그저 그 선교지에서 살아주는 것만으로 감사할 수 있으면 어떨까 싶다.
파송 기관과 선교사가 서로 깊은 신뢰를 쌓아서 그저 함께 할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된다면 서로에게 그보다 큰 복이 있을까?


강융이

2008.02.07 01:27:52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
말씀에 준거치 않고
인간적인 기준이나 관습이 적용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늘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원들을 대상으로 한 기업들의 현지화 교육처럼
선교사 파송에 있어서도
그런 현지화 선교 교육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한국 교회의 수준이 높아지지 않으면
한국 선교의 수준 또한 높아지기 어렵다는
선교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수많은 난관을 딛고 낯선 타지에서 선교에 전념하고 계시는
선교사님께서 수준 높은 선교의 표본이 되어주심을 감사드리며...

소중한 글 잘 읽고 갑니다.

이용규

2008.02.07 10:24:48

저 스스로 위에서 말한 내용에 자유롭지 못하고 넘어질 수 있음을 봅니다.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려거나 또는 저 본인이 이 문제를 극복했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목표 부분을 새롭게 점검해 보자는 의미의 단상입니다.

강융이

2008.02.07 20:38:46

목표 점검 차원에서의 선교사님의 깊이있는 단상 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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