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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미국 텍사스의 작은 도시에 머물면서 이민 교회로부터 집회 요청을 받아 두 달 동안 거의 매주 집회로 섬기게 되었다.

어차피 이번에 다시 선교지로 들어가게 되면 다시 미국 땅을 밟으며 이민 교회들을 섬길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마음의 부담 때문에 무리해서 일정을 잡고 말씀 집회를 가졌다.

집회를 다니면서 각각의 지역에 세워진 한인 교회들마다 특징이 있고 사명이 있고 또 도전이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민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과 그 분의 계획을 느낄 수 있었다.

 

특별히 집회 가운데 미주 지역의 한인 이민 교회가 가진 근원적인 문제점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이민 온 동기와 목적이 복음 안에서 죽지 않았다는 점이다.

많은 교회 안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자신의 이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의미가 있었다.

결국 자신들이 이민 온 땅에서 사명이 아닌 세속의 풍요와 번영을 추구했던 롯으로서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많은 이들이 교회에 남아있는 이유는 교회 안에 자신을 위한 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구에서였다.

이민 생활에서의 마음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자신의 자존감과 중요도를 확인시켜주는 교제의 장으로서 또 어려울 때 의지가 되는 장소로서 교회가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교회가 이민자들에게 이러한 역할을 해주는 것은 필요하고 바람직한 일이지만 이것이 근본 목적인 것처럼 오해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시카고 지역을 포함한 한인이 밀집된 대도시와 그 인근 교외지의 교회들은 지속적인 분열을 경험해 왔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적어도 세 교회 이상 교회를 옮겨본 경험이 있다.

교회에 문제가 터질 때마다 분란을 피해서 수평이동을 해 왔다.

결국 교회들간의 관계들도 깨어져서 연합 행사를 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다수의 교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에게 안정감을 주고 타지 생활의 위로와 의지처를 제공해 줄 좋은교회들을 찾으며 이주하고 있다.

그리고 연배와 수준과 관심이 맞는 교제권을 그 안에서 찾기 원한다. 많은 이들은 끝내 그런 교회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 삶의 중요한 부분을 다 보내버리곤 한다.

물론 이와 같이 교인들 다수가 필요만을 위해서 교회를 찾는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이민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 전반에 걸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필자가 한 번은 유럽의 어느 교회에서 신년에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었다.

내려놓음과 십자가라는 주제의 말씀을 전하기에 묵상하면서 기도하다가 문득 강대상 위에 걸려있는 플래카드를 보았다.

거기에는 신년 금식 축복 대성회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문득 당혹감이 찾아왔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주최측에서 기대하는 메시지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물었다. 

어떻게 하지요, 하나님? 제가 전해야 할 말씀이 무엇인가요?” 

내 마음 가운데 질문이 찾아왔다.

너 무엇이 진짜 축복인지 아니?  그것은 나를 소유하는 것이란다.”

 

한국의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자체를 축복으로 여기지 못하는 경우를 본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보다는 하나님 손에 들려있는 축복, 또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주어지는 대가에 관심이 더 많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가진 전통적인 신관과도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이 천지신명에게 또는 삼신 할머니나 산신령에게 빌거나 무당 굿을 해 왔던 이유를 안다.

그들은 이렇게 비는 행위를 통해 영적인 존재에게 잘 보이고 그래서 해를 면하고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했다.

천지신명이나 삼신 할머니 등을 사랑해서 지성을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기를 원했다. 목적이 이루어지면 거리를 두고 싶어 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닮아가며 그 분과 온전히 연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최근 시카고 인근의 여러 교회들이 분열을 경험하고 아파하는 상황이다.

거의 대부분의 중대형 교회들이 갈라졌고 교인들이 흩어졌다.

이것을 많은 사람들은 사탄의 소행으로만 보고 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그 이면에 그 공격을 허용한 큰 약점이 교회에 있었다.

그것은 교인들에게 교회가 그들의 필요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는 점이다.

 

시카고 지역이 팽창하면서 인근에 신도시들이 자라나면서 가정을 가진 중산층 이민자들도 학군이 좋고 생활이 편리한 신도시에 집을 사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을 중심으로 교회가 옮겨갔다. 다운타운 지역에는 유학생들만이 남았지만 외곽의 신도시(서버브) 지역에 들어간 교회들은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은 곧 떠나갈 사람들이고 보살펴 주어도 교회 성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으며 자신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논리가 우세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이들 교회는 자신들의 이세들의 신앙을 돌보기 위해 영어 예배를 만들었고 그 사역의 성장에 공을 많이 들였다.

즉 교회는 자신들의 필요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에 어느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지역의 교회들은 사명을 잃어 버렸다. 

관심이 내부를 향하면서 교회에서는 누가 더 많은 입김을 가질 것인가를 가지고 다투기 시작했다.

 

필자가 뉴저지의 어느 교회에서 주일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한 알의 밀알에 대해서 묵상하게 하셨다.

썩어지는 밀알을 통해서 수많은 열매가 맺히듯이 교회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연합이라는 것은 간단히 나 잡아먹고 당신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또는 나를 밟고 당신이 잘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죽고 희생할 이민자 교회를 찾고 계신다는 메시지였다.

당신의 한 교회가 죽어서 다른 많은 주변의 교회가 살아나고 귀한 연합의 열매가 맺히기 소망한다는 내용으로 말씀을 전했다.

안타깝게도 교역자 분들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교인들이 그 메시지의 내용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느꼈다.

십자가 복음을 경험하지도 누려보지도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민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이민의 목적과는 다른 목적의 이민이다. 그 예가 될만한 사례 두 가지를 잠시 나누고자 하는데 감동적인 이야기들이지만 보안상의 문제가 있어서 간단히 다루고자 한다.

현재 중동 지역의 이슬람의 견고한 진으로 둘려진 도시 가운데 필리핀 기독인 여성들이 들어가 있다.

그들은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점을 활용하여 가정부 또는 보모라는 신분으로 그곳에 들어간다. 

그리고 귀족과 명망가 자제들을 기독교 정신으로 양육하며 복음을 심어주고 있다.

때로는 성폭력의 위험 가운데 노출되기도 한다.

아이들이 그녀들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삶을 체험하는 일이 일어난다.

중국의 가정 교회 지도자들 중에 많은 수가 중동 지역의 한 국가의 부유층 종교 지도자 가정으로 가정부나 하인 신분으로 들어갔다.

말을 가르쳐 주는 조건으로 삼년간 급료 없이 그 집에서 봉사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그들은 계약 기간 동안 정성껏 주인을 섬겼다.

그러나 보통 일년이 지나면서 주종 관계가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집안에 있는 아픈 지체를 위해 이 중국인 가정부들이 기도하면 낫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들의 삶과 기도에 담긴 능력을 보면서 그 가정에 있는 구성원들이 그들이 믿는 예수에 대해서 배우기를 원하고 제자화가 진행되었다.

그와 관련된 놀라운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으며 그 지역으로 성경이 지속적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들이 사역을 마치고 돌아갈 때 주인들이 감사의 뜻으로 자신들이 가진 희귀 보석들을 선물로 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교가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기에 그것들을 타선진국 선교 단체나 교회에 보내주었다.

 

우리가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가정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만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명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

이민자 교회가 선교 헌금을 많이 하고 선교지를 위해 많이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보내심을 받은 땅에서 아브라함과 같은 이민자로 그리고 선교사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신학 교육을 받고 선교 훈련 과정을 마쳐서 파송 받아야만 선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보내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반응하며 내 몫의 십자가를 들고 따르는 사람이 선교사이다.

그 선교의 삶을 이룬 자는 선교지에서 온 선교사가 그 삶을 나눌 때 동일한 감동으로 반응하며 동일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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