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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죄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입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기를 소원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소망은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살고싶어하는 충동과 부닥친다.  근대 사회를 지나오며 인류는 “자유”와 “독립”을 지고의 가치로 숭상해 왔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때 자유로와진다고 우리를 속인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에게 구속될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죄로부터의 자유이다.  
인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행동의 영역만이 아닌 생각과 영의 영역에서도 죄에서 자유로와지기 위해서는 심각한 결단이 요구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의 옛 자아를 못박기로 결단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죄의 문제로 인해 괴로와하게 된다.  사도 바울이 고백했듯이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않는 죄 속에 빠져가는 우리의 죄된 속성과 정면으로 부닥뜨려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의 빛 가운데 우리의 삶과 생각의 모습들이 비쳐질 때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괴로와한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 나라로 세우셨음에도 불구하고 (출 19:6),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를 원하지 않고 모세가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전해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출 20:19).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가에서 예수님의 물고기 기적을 보고 자신은 죄인이니 자신을 떠나달라고 고백한 것이다.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와 맞부닥뜨려지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죄된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 대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죄된 모습을 끊지 못하기 때문이다.  죄된 모습을 끊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보다 죄가 더 사랑스러운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죄와 하나님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대상에 대한 사랑은 질투를 유발하게 마련이다.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영역 가운데 어떤 부분에 대해 말씀하시기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를 방어하곤 한다. 우리의 삶의 어두운 부분에 하나님의 빛이 비춰질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숨으려 하곤 한다.

“하나님, 이 부분만큼은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하나님, 시간이 필요해요.  잠시 내버려둬 주세요.”
“하나님, 이 정도쯤은 눈감아 주실 수 없나요?”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를 간섭하는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고 온전케 하시려는데 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우상이 된다.  우리는 많은 경우 우리의 나쁜 습관을 우상으로 가지고 있다.  인터넷에서 음란물을 보는 것,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미워하거나 험담하고 흉보는 것,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기, 머릿 속의 나쁜 상상 등을 계속한다면,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죄가 주는 은밀한 달콤함이나 습관을 따라사는 편리함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눈으로 죄를 바라볼 때,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있다.  죄를 싫어하고 경멸하기를 개가 토한 것을 바라보듯이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의 삶과 생각 속에 더덕더덕 붙어있는 죄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것들이 깨끗이 씻기기를 열망할 수 있다.

둘째, 판단하는 마음

예수님께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일차적 이유는 판단받는 사람을 판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다.  판단하는 사람을 그 판단의 흉악한 결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심이다.  즉 우리가 판단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리가 판단하는 버릇과 그것이 주는 크나큰 영적 해악에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한 예로 설교를 판단하거나 교회 지도자를 판단하지 말라는 이유는 교회 지도자를 보호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다.  우리가 설교를 판단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닫혀서 더 이상 설교가 우리에게 은혜로 다가오지 못한다.  판단의 영이 우리를 장악하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의 누군가를 판단하게 되면 교회를 나오기 싫어지고 교제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실은 교회 목회자가 삶 가운데 많은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설교를 통해서도 은혜받을 수 있다.  말씀 자체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혜로운 자가 누리는 축복이다.  
아무리 의로운 쪽에 서서 하는 판단이라고 하더라도 판단하는 순간 우리 마음 속에 상처가 생긴다.  그리고 마음을 단단하게 한다.  문제는 우리 마음에 상처가 생길 때, 죄를 짓는 것은 상처받은 쪽이라는 사실이다.  상처준 사람은 대부분 상대방의 마음에 걸림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넘어간다.  마음에 상채기가 난 사람은 그에게 상채기가 나게 한 사람을 계속 마음에 품고 있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악한 영은 대부분 분노의 영이나 미움의 영으로 그 상처를 확대시킨다.  판단의 영은 분노나 미움을 촉발하게 마련이다.  

우리가 의와 불의 그리고 지혜와 무지를 분별하는 것은 필요하다.  단 분별과 판단은 다르다.  분별은 영적인 지혜에서 오는 것인 반면, 판단은 분노의 영과 미움의 영을 불러온다.  분별은 하나님의 사랑의 눈으로 상대방을 보는 것이다.  판단은 나의 의의 기준을 가지고 상대방을 재는 것이다.
판단의 영에 지배를 받게 되면 잘못을 누군가에게 전가하되 책임은 지려하지 않는다.  주위를 비난하지만 용서와 화해를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다.  판단의 영은 이렇게 해서 판단하는 사람의 영혼을 무디게 만들고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깨뜨려버린다.

내가 지속적으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있다면 내가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후예이고 그가 아직 옛사람을 벗어버리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란 스스로가 선악을 판단하게 하는 실과라는 뜻이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의 기준을 가지고 싶다는 욕구에서 나왔다.  즉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는 하나님이 판단의 주체가 아니라 내가 판단의 주체로 독립해 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선교지에 와서 나는 이 진리를 보기까지 누군가를 판단한 적이 있었다.  많은 선교사분들의 모습 가운데 부족하고 변화되어야 할 모습을 보고 힘들어 한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선교사로 헌신하기까지 이곳에 결단하고 온 그 분을 얼마나 사랑하고 또 그 변화될 모습을 소망하고 일하신다는 것을 미쳐 보지 못했다. 현재의 미성숙한 모습에 대해 마음 속으로 문제가 있다고 느꼈을 때, 그 분을 보는 내 눈이 곱지 못하고 내 마음이 편하지 않음을 발견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부분을 만지신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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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선교회 WCS 훈련 강의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강의가 있습니다.  어려운 주제라 맡을 사람들이 없어서 결국 아무도 없으면 제가 하겠다고 자청했습니다.  

준비하면서 다룰 수 있는 주제라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강의안이 나왔어도 제 안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느껴지지 않은 것을 설교하거나 가르칠 수 없다는 생각에 부담을 느끼다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한참을 기도하는데 내게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의 마음이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큰 아들이 자기 동생을 판단했던 것처럼 내 안에 판단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주변의 사역자 분들을 보면서 그 분들의 부족한 부분들과 더 성장해야 할 부분을 보곤 했는데 그러다 보니 잘 하고 있는 부분들에 대한 칭찬과 격려를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랑하는 말을 할 때도 "그 정도가 칭찬할만한 일일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그 동안 주위 사람들을 판단했던 것들을 담은 리스트를 찢으라고 하셨습니다.   결단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조금씩 내 안에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강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동연 엄마와 이야기하던 중 동연 엄마도 이 부분 때문에 상처를 받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안아주어도 기쁘지 않은 적이 많았는데 그 상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위로받기를 기대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이야기하면 위로해주기보다는 정답을 제시해 주는 것 때문에 마음이 닫힌 적이 있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사과하는 기도를 하고 다시 안아주었습니다.  
불안해 하며 물었습니다.  
"어때요?"
"응, 많이 좋아졌어요."

교수님 중에 제를 힘들어 하시는 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잃어버린 기회 때문에 힘들어 했던 분인데 제가 아마 그것을 기억나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분에 대해서도 충분히 인정하고 격려하는 말을 해주지 못했음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부부 동반으로 식사 초대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간동안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듣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식사 중 그 분은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그 분 가운데 참 인정받을 만한 귀한 부분이 많음을 보게 되었고 그것을 인정해 드리고 어려웠던 과거에 동감해 주었습니다.  식사 후 그 분이 밝은 표정을 지었고 지금도 저를 볼 때 그러함을 느낍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깊은 마음 속에 있는 인정받고 싶어하는 어린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는 사랑과 인정을 받아야 위안을 누린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일 설교와 WCS 강의 때 많은 분들이 울었습니다.  결국 내가 은혜를 먼저 누리고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만지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을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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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에 하나님께서 이 부분과 관련해서 다시 한 번 나를 만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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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던 중에 하나님께서 제가 화를 품은 적이 있던 분 한 명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부천의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저희 학교를 방문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학교를 나오려는데 그 때 소개드렸던 한 장로님이 제게 물으셨습니다.  
"정말 하버드 나왔수? ”
“…. 예”
“근데 왜 이딴 대학에 있는지 모르겠네...”

’이딴 대학’이란 말로 인해 마음에 걸림이 왔습니다.  장로님과 목사님이 되어서도 도대체 헌신과 선교에 대해 이해하심이 저토록 없을까 하며 한심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그 분들의 말이 다시 떠올랐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때 내가 마음에 화를 품었고 그 분들을 판단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순간 제가 왜 화가 났는지 그 본질적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들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실은 제가 학교에 대해서 한 동안 자랑스러움이 없었다는 사실을 보게되었습니다.   몽골에 온 초기에 우리 대학의 어려운 모습을 보면서 힘든 적응기간을 한 달 정도 보냈습니다.  그 당시 같이 졸업한 친구들이나 미국의 교수님들께 내가 이 학교에 있음을 굳이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아 하던 내 모습이 빛 가운데 드러났습니다.  
이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다른 사람들의 말에 속상함을 느꼈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가지고 너를 평가하지 않는다….  네가 내게 누구이며 어떤 모습으로 내 앞에 서있는가가 내게는 중요한 관심이란다."

그렇습니다.  내가 어느 교회, 어느 선교회, 어느 학교, 어느 기관에서 어떤 부서를 맡고 있는가는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저 내가 그 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나를 보고 계실 뿐입니다.  그 분의 사랑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음을 다시 확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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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단기 선교팀을 맞으면서 하나님께서 판단하는 영의 문제를 많이 다루셨다.  의외로 한국 교회의 신앙이 좋은 분들 안에 교회에 대한 상처들이 많이 있고 이로 인해 판단의 영에 붙들려 있는 것을 보게 하셨다.  
지난 여름에 온 단기팀 중에 나를 기도로 또는 물질로 섬기고 후원하시던 연로하신 권사님이 계셨다.  몽골 선교에 대해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함께 기도하던 중이었다.  권사님께서 내게 기도받기를 요청하셨다.  
권사님의 허리가 안좋으셨는데 무리해서라도 단기 선교를 오시긴 했는데 거동이 불편하니 다른 팀원들에게 짐이 될까 염려하셨다.  그래도 단기 선교를 오시면서 이용규 선교사에게 기도받으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으셔서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당사자인 나도 놀랄 믿음인 것은 분명한데 과연 기도해서 권사님의 허리가 나을 것에 대해 나는 하나님께 들은 바가 없으니 난감했다.  함께 허리를 놓고 기도하는데 앞이 캄캄하게 보이고 빛이 보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기도 중에 그 캄캄함이 뚫리지 않음을 느꼈다.  
기도 후 교제하고 나서 나는 여행 준비를 위해 볼 일을 보러 나갔다.  저녁 때 권사님의 영적인 문제가 먼저 다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판단하는 마음과 관계된 것이었다.  
다시 권사님을 뵈러 단기팀 숙소로 들어가 조용히 따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이 주어졌다.  알고보니 권사님 교회의 당회가 목회자를 쫒아내려는 문제로 두 쪽이 났다.  그 와중에 정치적 문제가 개입되어 몽골 단기팀 선교비 지원이 중단되는 사태가 생겼고 그 과정에서 권사님이 담당 장로님들과 많이 논쟁을 하시게 되었다.  교회의 장로분들에 대한 분노와 원망, 판단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나는 권사님께 말씀드렸다.

“하나님께서 권사님이 판단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라십니다.  그 이유는 장로님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권사님을 위해서입니다.  판단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곳에 와서는 이곳의 영혼들을 만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질병도 더 나아지지 않을 겁니다.”
      
권사님께서 많이 우셨다.  하나님께서 내려놓으라고 하시지만 그래서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돌아서면 내려놓아지지 않고 내려놓기 싫은 마음과 싸우시는 과정이 기도 가운데 계속되었다.  이 과정을 겪으면서 판단하는 마음의 깊은 뿌리가 얼마나 깊이있게 우리의 교회생활 내에 박혀있는지를 보았다.  

사탄의 관심은 교회 내에서 영적으로 앞서있는 지체들을 쓰러뜨리는데 있다.  그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사탄은 판단의 영을 불러일으키고 판단거리를 그들의 눈앞에 둔다.  우리가 판단하는 순간 우리는 올무에 걸리는 것이다.  

올 여름 몇 명의 아픈 단기팀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고 고치는 시간을 가졌는데 많은 경우가 교회 생활 중 지도자에게서 받은 상처로 인해 생긴 원망과 판단의 마음이 그 아픔의 뿌리 가운데 있음을 보았다.  판단하는 마음을 가지는 한 우리는 영적으로 순결해질 수도 건강해질 수도 없다.

판단의 영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판단하려 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어?  하나님은 과연 선한 분이신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우리에게 발생했을 때, 우리는 이렇게 묻곤 한다.  하나님이 옳은 분인지 그른 분인지, 신뢰할만한 분인지 아닌지 우리는 판단하려 한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졌을 때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판단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을 죽여 제사하는 것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이방 종교의 풍속이었다.  사람을 제사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이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계시가 왔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의심하거나 하나님을 판단하지 않았다.  순종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지 않았다.  

끝으로 우리는 때로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판단하고 괴로와할 때가 많다.  결국 내가 나를 판단하는 마음이 내려놓아질 때, 우리는 평온함을 되찾는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해 판단하는 마음도 쉽게 내려놓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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