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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아야 하는 이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험을 주셨다.  자신의 사랑하는 이삭, 즉 100세에 낳은 아들이자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의 약속을 계승할 자를 모리아 산에 가서 하나님에게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다.  
모리아 산까지 가기 위해서는 3일길을 가야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성경에는 아브라함의 심정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나와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해 아무런 대꾸없이 이삭을 데리고 이 길을 걸었다는 사실이다.  
그 길을 다 걷고 난 부자는 모리아 산에 오른다.  지금의 예루살렘의 외곽에 위치한 산이다.  하나님께서 훗날 당신의 아들을 죽이기로 예정하신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아무 말 없이 아브라함은 칼을 들었다.  이 순간은 하나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위대한 계획이 점화되는 순간이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도 그 동안 그가 맺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것임을 실제로 확인하고 또 그가 쌓았던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순종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삭을 빼앗는데 있지 않았다.  하나님의 관심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이 이삭되게 하는데 있었다.  즉 아브라함의 자식으로써의 이삭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이어 계승하고 그리스도가 날 가문을 잇는 자로써의 이삭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칼을 높이 들었을 때,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의 포기의 제사를 받으셨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가리고 계셨던 준비하신 것을 보이셨다.  이삭을 대신할 희생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브라함이 칼을 높이들기 전까지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놓으라고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내려놓을 때 그것이 진정한 우리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주인노릇하는 사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가지라고 그리고 꼭 붙들고 있으라고 요구한다.  내려놓으면 모두 잃어버린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 내려놓는 순간 우리는 모두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하나님의 주시고자 하는 성품에 의심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내려놓으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다.  내려놓을 때 주어지는 가장 좋은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강이다.  

불교나 뉴에이지와 연관된 사상들도 우리에게 비우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은 비우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비우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기 위한 전단계로써 비우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것이 비움의 궁극적 목적이다.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깨닫고 경험하게 된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도 이삭이라는 우상이 있다.  다른 여러 가지로 표현되지만 하나로 요약하자면 바로 우리의 행복이다.  우리는 행복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간다.  실은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  이것은 행복이 우리의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이라는 우상을 섬겨 주는 도구로 취급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행복해지고자 하는 열망과 우리의 행복해질 권리를 하나님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

유학 생활을 통해서 그리고 몽골에서의 선교사의 삶을 통해서 나는 내려놓는 자는 하나님의 것을 받는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체험했다.  한 가지 예로 베르흐 지역의 벌러르라는 자매가 잃어버린 소를 버려두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달려왔을 때, 나는 자신있게 그의 믿음의 결단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자신있게 그렇게 기도했다. 내 삶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벌러르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것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은 두 주인을 섬겨서는 안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게 둘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세상과 하나님 두 가지를 다 누리고 싶어한다.  그래서 두 가지 길 사이에서 방황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두 가지를 동시에 같이 가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과 하나님 둘 다를 누리고 싶어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잡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세상을 잡고 있는 것이다.  양쪽에 걸치려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결정적인 순간에는 십자가가 아닌 세상을 택하게 마련이다.  
십자가의 길은 내려놓음의 길이다.  자기가 죽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는 과정 중에 꼭 거쳐야 할 단계이다.  세상에 대해 내려놓아진 바 되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몽골 땅에서 목회를 하면서 이 진리에 대해서 거듭 확인하게 된다.  몽골에는 집집마다 우상이 있는데 이 우상을 차마 내려놓지 못하는 교인들이 있다.  이들은 결코 다음 단계로 신앙 성숙을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을 입으로는 고백했지만 그 고백이 마음에 이르러 구원에까지 나아가지는 못한 모습이다.  
우상과 관련된 한 경험을 홈페이지에 나눈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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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마치고 그리고 심방을 마치고 저녁 9시 반이 넘어 집으로 왔는데 배가 고프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밥보다 더 좋은 일을 했기 때문이지요.  

저희 교회에 몇 달 전부터 나오던 45세 된 자매님이 계십니다.  대장염 수술 이후 불임이 되어서 미혼으로 사시는 분인데 집에 70이 넘은 노모가 계십니다.  그 노모는 교회에 나가고 싶은 생각이 작년 가을부터 있었지만 거동이 불편해서 교회를 출석하지 못한 분입니다.  

오늘 그 분 댁에 심방해서 그 할머니를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할머니께서는 예수님을 믿으려고 보니 당신 집에 있는 우상이 마음에 걸린다고 했습니다.  간등사에 우상을 보낼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주저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 한다고 하셨습니다.  (몽골 사람들은 우상을 그냥 없애버리면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믿지요.)  그래서 제가 그것들을 제가 처리할테니 제게 넘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교회를 다니는 딸이 난색을 표했습니다.  십수년 전 간등사에서 그 우상을 받을 때 라마승이 집안에 도둑이 자주 들지 않았느냐고 물었답니다.  맞다고 하니까 그 우상을 주었는데 그 뒤로는 도둑이 들지 않아서 신통력이 있는 우상이라고 생각해서 차마 내려놓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더구나 술먹고 화가 나면 자기를 때리는 동생이 있는데 그 동생이 알면 큰 일 난다고 걱정을 했습니다.  

저는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삶과 죽음을 관장하시는 분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잡신을 따를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된 자를 어떻게 하나님이 지키시는지 그리고 그를 믿는 자에게 어떤 평안이 오는지를 설명했습니다.  

할머니는 결연히 비닐 봉지를 꺼내더니 향로와 우상과 그림들을 싸서 넣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장롱 속에 넣어두었던 부적과 문앞에 걸린 부적도 함께 넣어서 제게 건넸습니다.  그러면서 말했습니다.  작년에 교회 나오고 싶은 생각이 들 무렵 그 우상이 자기의 올무가 되는 것 같아서 벗어버리고 싶었지만 두려운 마음 때문에 어쩌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비로소 우상숭배가 주는 두려움으로 부터 벗어나 자유함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그 분을 보면서 교회를 다니지도 않았지만 바른 믿음을 가지셨음을 보고 놀랐습니다.  우리 이레교회를 오래 다니는 분 중에 여전히 우상을 집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분은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이 믿음이 아님을 깊이 느끼고 계셨습니다.

우상 보따리를 들고 나오면서 우리 일행은 찬양을 불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다른 사람이 그 우상을 가져다 쓰지 않도록 쓰레기 덤프장에서 우상을 발로 부셔서 버렸습니다.  그 할머니의 마음에 느껴졌다는 시원함을 공감하면서 그것들을 부수어 버렸습니다.  몽골에 있는 것이 행복합니다.  한국이나 미국에서 목회하시는 분들이라면 느낄 수 없는, 우상을 깨는 후련함을 이곳에서는 느낄 수 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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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상을 버렸던 이 아주머니는 얼마 있다가 다시 흔들렸다.  집안에 여러 문제들이 생기자 사나운 동생의 위협 때문에 결국 라마승을 찾아가서 그가 시키는 일들을 집에 와서 했다.  그리고 나서 그 분의 노모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일이 생겨 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우상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이 우상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우상을 달래주거나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행복을 빼앗길까 봐서이다.  즉 세상이 주인이고 하나님이 주인되지 않는 모습이다.  이들이 교회는 나오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축복은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불행하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어떻게 보면 우상 위에 자신의 행복이 있다.  우상을 섬기는 궁극적 이유는 세상에서의 행복을 위해서다.  우상 숭배자의 궁극적인 신은 자신의 세상에서의 행복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세상에서의 행복이라면 우리는 몽골의 우상 섬기는 교인들과 다를 바 하나 없는 사람들이다.

사탄의 올무를 벗어나는 방법은 사탄이 요구하는 것과 반대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사탄은우리로 하여금 불행해질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한다.  우리가 사탄이 주는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불행을 감수하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내 행복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할 때 두려움은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
몽골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여전히 저주를 두려워한다.  저주하는 무당의 저주를 무서워한다.  이들이 저주에 대한 두려움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그것을 내어놓기 전에는 그들이 저주의 두려움에서 놓이지 못함을 본다.  하나님 한 분만이 인생의 주인되심을 인정할 때 우리는 참 평안을 누리게 된다.

우리가 자신의 권리로 여기던 무엇을 포기하고 내려놓는다는 것은 우리가 성장했다는 증거이다.  동연이를 통해 나는 그것을 여러 번 확인했다.  아래 이야기는 그 중 한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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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연이가 제게 와서 정중하게 부탁을 하더군요.
"아빠, 말썽꾸러기 이야기랑 개구리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저는 동연이가 잠들기 전에 이야기를 해주곤 하는데 말썽꾸러기라는 주인공 아이가 로보트와 함께 세계를 여행하며 모험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많은 다양한 문화와 세계에 대해 가르쳐 주고 싶었지요.  그런데 요즘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에게 떠맡겨서 엄마가 예수님 이야기를 해주곤 하고 있었습니다.

동연이가 다시 말했습니다.  
"아빠가 너무 피곤한 것 같아서 엄마에게 이야기하라고 한거예요.  그런데 장난꾸러기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요."

그리고는 말을 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빠가 너무 피곤하면 이야기 안 해주셔도 돼요.  엄마도 피곤하면 그냥 주무셔도 되고요.  나는 이제 참을 수 있어요."

그 이야기를 동연 엄마가 연구소에서 돌아오자 마자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말고 울먹이는 제 자신을 보았습니다.  동연이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배려하는 생각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동연이의 성장을 보고 이렇게 감동하는 제 모습을 보며 하나님이 나의 성장을 보고 어떤 감동을 받으실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이 되기를 다시 한 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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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성장은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충분히 기쁘시게 할 정도로 성숙되어 있는가?  내 것으로 붙들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제 하나님께서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라고 내게 말씀하셨던 것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홍유진

2005.11.02 23:18:19

선교사님.. 안녕하시지요? ^^
광야일기 시리즈를 보며 참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삶을 나누어주시고 전해주시는 신앙의 선배님이 계심에 하나님께 정말 감사합니다.
선교사님 말씀대로 좀 더 하나님께 집중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은혜의 말씀들 기대하겠습니다.
그럼 조만간 한국에서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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