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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대한 계획을 내려놓는 부분은 유학을 준비하면서 또 유학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훈련시키셨던 부분이다.  이미 “미래 맡기기” 부분에서 내 삶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증거하면서 설명했던 주제이다.  이 부분은 그 이후 몽골 선교 과정에서도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계시해 주셨던 부분이기도 하다.  
북경 코스타에서 마지막날 아침 규장의 여진구 사장님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여 사장님은 내게 코스타 출신 강사분들의 간증을 포함해서 10년 후의 나의 모습이라는 주제로 글을 모아 책을 내는 계획에 대해 말씀하셨다.  내가 여기 참여할 가능성에 대해 물으셨다.  문제는 내가 미래에 대한 계획 없이 살고 있다는 것에 있었다.  나는 대답했다.

“저에게는 계획이 없는데요.  일년 뒤에 내게 어떤 일이 생길지 그리고 내가 어떤 위치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계획하고 그리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것이라는 것이죠.”

여 사장님은 실은 그것이 본인이 원하던 답이라고 말했다.  자신도 그렇게 살려고 하고 있다며 늘 계획없음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더 큰 것을 허락하시는 것에 대해 나누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큰 것을 버리게 되지 않는다.  작은 것을 내려놓는 단계적인 훈련을 겪고 나서야 우리는 큰 것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아브라함을 훈련시키셨던 방법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시간 가운데 그에게는 여러 번 실수가 있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함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실수의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갔고 결국 이삭을 바치라는 최후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광야 삶의 마지막에 가서는 우리는 궁극적인 질문에 부닥치게 된다.  즉, 무엇이 나를 추진해 가는 본원적인 힘인가 그리고 무엇이 나로 하여금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추진력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또 사역을 하고 직장이나 학교 생활을 하는 중에 나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하는, 마음 속의 깊이 숨은 욕구에 관한 질문이다.  순결한 성령을 향해 우리의 전 모습을 열어보일 때 우리의 사역 배후에 숨겨진 동기가 드러나게 된다.  이것은 내가 품은 미래의 꿈 그리고 계획 배후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욕구가 무엇인지 솔직하게 자신에게 묻고 대답하는 일이다.  그 욕구를 하나님께 내어놓고 그 분의 만지심을 받는 작업이 없이는 우리의 광야 생활이 마무리되지 못한다.  

미래의 계획을 맡긴다는 것은 내가 구상하는 타임 테이블도 함께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말한다.  즉 내가 소망하는 것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질 시점과 타이밍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이다.  한국의 문화는 나이에 민감한 문화다.  나이에 맞추어 사회적 대우와 조건이 결정된다.  어느 나이가 되기 전에 입사하지 않으면 회사에 다닐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일정 나이가 되기 전에 무언가를 손에 잡으려고 안달하며 불안한 시기를 보낸다.  더욱이 젊음과 육체적 매력을 강조하는 문화 속에 휩쓸려 빠른 시기에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하는 욕구에 쉽게 젖는다.  
교회의 성도들도 이러한 풍조에 휩싸여 있다.  교회 지도자도 빨리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일에 분주하기 쉽다.  하나님의 타임 테이블은 내 욕구에 밀려 안중에도 없게 된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 늘 외친다.  
“속히 주시옵소서.”
나 또한 20대 후반에 인생에 대해 불안한 시점을 보냈다.  한 해라도 먼저 공부를 마치고 싶은 욕구가 내게 있었다.  빨리 빨리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에 대해서는 신뢰하지만 타이밍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계획과 내 욕구가 달랐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근대 사회 맞으며 세계는 빠른 속도로 변해간다.  그 무렵 유럽의 대도시에는 근대의 문명을 상징하는 거대한 시계탑이 솟기 시작했다.  시계가 문명의 상징으로 부상하고 시간의 폭압이 우리를 누르기 시작한다.  그 이전의 시기와는 다른 시간관이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시간에 오차가 생기면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배가 멈추어서는 위험한 순간을 맞는 시스템 속으로 우리의 삶이 맞추어져 들어갔다. 시간을 맞추지 못하거나 학교와 직장에 지각하는 것은 “아주 질이 나쁜” 습관으로 여겨진다. 그러면서 점차로 더 부지런히 더 바쁘게 살아야 성공한다고 믿게 되었다.
한국 사회도 새마을 운동과 같은 근대화 운동의 시기 시간을 아끼는 미덕에 대해서 강조하기 시작한다.  “새벽종이 울렸네.  땡하고 울렸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만드세”라는 노래에서 상징되듯이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잠자는 시간을 아끼는 것이 필요했다.  
한국 교회도 시간을 아끼고 통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근면의 미덕이 강조되고 게으름을 책망하는 내용의 가르침이 강단에 넘쳐 흘렀다.  

근래 들어 한국 사회는 더 정신없이 분주해져 간다.  특별히 IMF의 충격파 이후, 사람들 사이에 바쁘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중독 증상이 나오고 있어 보인다.  바빠보이는 것이 미덕이 되고, 너무 바쁘다는 말이 자랑처럼 나오기도 한다.  일과가 끝난 저녁에는 늘 만남을 만들고 지속적으로 여러 사람과 관계의 끈을 만들려고 애쓰는 모습이 자주 눈에 뜨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낙오될 것 같은 불안감이 엿보인다.  교회도 사회의 영향을 받아 정신없이 일과 프로그램으로 몰려가고 있는 경향을 본다.
이러한 노력의 배후에는 우리가 잘못 시간을 경영하면 인생을 허비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작용하는 것 같다.  시간을 아낄라고 노력한다고 인생을 허비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순전히 의지할 때 우리의 인생이 귀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지게 된다.

“때를 아끼라”는 성경 구절은 많은 경우 더 열심히 살라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신약 성경을 기록한 언어인 그리스어에는 시간에 해당하는 단어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물리적인 시간을 지칭하는 크로노스이고 다른 하나는 때, 기회를 뜻하는 카이로스라는 단어다.  이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때를 말한다.  성서에서 말하는 때를 아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잡으라는 뜻이다.  
우리는 열심히 물리적인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정작 중요한 하나님의 기회를 잡는데는 소홀할 수 있다.  무의미하게 믿음없이 반복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애써 추구하는 그 일들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무의미한 반복일 수 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이라고 믿고 쌓고있는 많은 행위들이 우리는 시간을 쌓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일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선교사로써 이곳에서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세우신 뜻을 물을 때, 하나님께서 내가 더 많이 설교하고 더 많이 전도하고 더 많이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고 나의 욕심이나 공명심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음을 보았다.  더 바쁘게 살려는 모습이 늘 하나님 앞에 온전한 모습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셨다.  정작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이루어진 것이 없을 수도 있다.  이스라엘에는 여전히 병자들이 넘쳐나고, 믿지 않는 사람과 죄인들 투성이었다.  일에 초점을 맞춘다면 예수님은 너무나 많은 것을 하지 않으시고 돌아가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이루셨다고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완벽한 스케쥴과 타이밍 가운데 있으면서 그 분의 계획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실 인류 구원의 계획을 신뢰하면서 당신이 받아야 할 그 고통의 잔을 받으셨다.  그 믿음과 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온전하신 계획이 다 이루어졌다고 고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읽으셨고 그 기회를 잡으셨다.  예수님의 사역 기간이 3년으로 될 것인가 10년 이상 늘어날 것인가 자체는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내가 20대 시절 가장 부담스러웠던 성경 말씀 중 하나가 누가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같이 가주라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에는 당시 시대상에 비추어 보건대 로마 시대의 부역 제도와 관련해서 로마 병사나 행정관이 부역차 식민지의 백성들을 끌고 부역하던 것에 대해 그러한 부역에 대해서도 더 적극적으로 도우라는 말씀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겉옷은 벗어주라면 줄 수 있지만 바쁜 학창 시절을 보내는 나로써는 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시간만큼은 내가 관리하고 싶어 했다.
시간은 내가 아끼려고 한다고 해서 아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타이밍이 변동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자의 믿음 생활에는 시간과 타이밍이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음을 인정하고 안온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요구된다.
실제로 우리가 한 달을 열심히 작업한 것이 무의미하게 끝나버릴 수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도 수개월 이상 열심히 수집한 자료가 후에 무의미한 것이 된 적이 여러 번 있다.  전공이 바뀌면 이전의 전공을 위해 잡다하게 준비한 것 중 많은 것이 전혀 필요없게 되기도 했다.  열심히 시간을 내서 공들인 관계가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반면 군대에서 말년에 좋은 보직으로 옮겨가 앞으로의 군대 이후의 일을 준비하는데 귀히 쓰이도록 인도된 경험도 있다.

우리는 종종 열심히 잠을 줄이고 쉬는 시간을 줄이면 시간이 더 많아질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어떤 방향을 향해, 어떤 방식으로 시간을 쓰는가가 하나님 앞에서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내가 시간을 어떻게 쓰는가를 보면 내가 나를 위한 인생을 사는 것인지 아니면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사시는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

우리 눈에는 모세의 사십년 광야 생활이나 아브라함의 오랜 광야 생활이 낭비된 시간처럼 보일 수 있다.  이러한 기나긴,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 오랜 기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성장시켜 가셨다.  이 기간이 인생의 목적이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을 성취하는데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인고의 시기일 것이다.

몽골 초원을 여행하면서 나는 인생길에 대해 묵상하곤 한다.  죽죽 뻗은 미국의 고속도로를달릴 때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만나게 된다.  미국의 인터넷의 지도 서비스를 요청해서 보면 고속도로를 통해 가장 단시간내에 목적지까지 도달하도록 잘 설명해 준다.  고속도로 여행에서는 단시간 내에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미덕이 된다.  몽골 초원을 달릴 때는 시속 30 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여행하기 힘들다.  차에 무리가 가고 차에 탄 사람들도 충격을 너무 크게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달리다가 타이어가 펑크나면 기다려서 고쳐가지고 다시 떠난다.  강을 만나면 건널 수 있는 지점을 찾아 멀리 우회한다.  산을 만나면 물어 물어 돌아서 가야한다. 여러 갈래 길 중에 편한 길을 찾아 가면 된다.  그런가 하면 목적지를 가기 위해서는 꼭 거쳐가야 하는 지점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길을 가면서 단기간 내에 주파해야 하는 여행과는 다른 개념의 여행과 맞닿게 된다.  우리가 가야하는 인생길과 흡사하다.
몽골 초원을 여행하다 보면 강을 자주 만단다.  초원에 흐르는 강은 많은 굴곡을 만들며 돌아돌아 구비구비 흘러간다.  이 강이 가는 방향이 있다.  바로 낮은 곳이다.  낮은 곳을 향해 가며 평원의 파인 곳 사이를 누비면서 흘러간다.  강기슭은 항상 푸르름이 있다.  강 주변에 풀과 나무가 자라며 그곳의 동물들이 서식할 수 있도록 해준다.  강이 돌아가면 갈수록 초원의 더 많은 지역이 푸르러진다.  강의 미덕은 빨리 목적지를 가는 것이 아니다.  돌아가면 갈수록 강을 통해 주어지는 축복의 지역이 더 넓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초원의 강이 가는 길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목적을 이루는 것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다양한 만남을 갖고 또 그 만난 사람과 땅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돌아가고 돌아갈수록 우리의 주변은 풍성해진다.  그리고 그 지향점은 낮은 곳이다.  

하나님의 큰 계획 가운데 우리를 참여시키시기 전 하나님은 우리 앞에 좁고 험해보이는 길을 보여주신다.  하나님이 주시는 길은 대부분 일견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보이는 길이다.  마음이 가난해지기 전에는 붙잡기 어려운 길이다.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넓어보이는 길을 내려놓아야 택할 수 있는 길이다.  넓어보이는 길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 선택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흘러간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특별한 축복을 약속하시는데 그 이유는 그 복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익숙한 땅을 떠나 하나님과 여행을 시작했다.  복없는 광야를 향해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 전 인류에게 하나님의 복이 흘러가게 되었다.

좁은 길을 선택하는 자에게 준비해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은 그 길을 선택하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삭 대신에 준비해주신 희생제물된 양은 아브라함이 순종하기로 결단한 이후에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우리가 미래를 맡기는 순종의 결단을 하기 전까지는 철저히 가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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