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국 노마드 - 인도네시아 이용규 선교사 웹사이트입니다. ::
앞에서 열거한 내려놓아야 할 것들 보다 훨씬 더 내려놓기 힘든 것이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임을 본다.  그에 비하면 물질을 내려놓는 것은 훨씬 쉽게 느껴진다.  특히 나는 선교사와 교수로써 사역하면서 명예에 대해 쉽게 버려지지 않는 경우를 접하게 된다.  마치 양파껍질 같아서 벗긴 것 같으면 또 다른 껍질이 있고 벗기면 또 다른 껍질이 발견된다.  
미국에서 몽골을 향해 오면서 많은 것을 버릴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붙들고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였다.  유학 기간 중 이 부분에 대해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았지만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던 것이었다.  이것을 깨닫게 된 계기가 있었다.  이 한가지만으로도 내가 이 주제로 하고 싶은 내용을 모두 담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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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교회에서 머리숙이고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 마음이 상한 부분이 있구나.  왜지?”
생각해보니 상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오늘 대사관에 신임 대사를 만나러 갔었습니다.  어제 무리해서 한인 교회 오전 예배에 가서 대사님을 뵈었고 주중에 찾아가겠다고 약속하고 오늘 오후에 바로 전화해서 만나뵈러 갔지요.  왜냐하면 오병이어 선교회에서 옵스 아이막으로부터 초청한 학생들의 비자 발급이 거부되었는데 그들에게 도움이 될까해서였습니다.  많은 돈을 빌려서 비행기를 타고 울란바아타르시까지 와서 한달여를 기다렸는데 다시 돌아가야 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혹시 도움이 될까해서 대사님을 찾아가서 기회가 허락되면 그 문제를 말해보려고 한 것이지요.  또 MIU에서 학생들을 한국에 단기로 보내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 일에 대해서도 설명하는 것이 저희 학생들 비자 받는데 도움이 되겠다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제가 MIU 대학에서 가르친다는 설명을 듣고 난 대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곳 몽골에서는 대학 총장, 부총장이라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 보니 이곳 대학이 180여개나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학이 다 대학이 아니지요.  한국에서 지었다는 대학들도 한국 대학처럼 생각해서는 안되겠더군요.”
“다른 대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MIU에는 자격을 갖춘 교수님들이 많이 있지요.  카이스트라든가 한국의 대학에서의 자리를 내려놓고 오신 분들도 있고 박사학위 소지자도 7명이 됩니다.  저도 갈 곳이 없어서 MIU에 온 것이 아닙니다.”
“잘 생겼다라든가 공부 잘 한다 소리는 옆에서 다른 사람이 해줄 때 의미가 있지 자기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요.”

맞는 말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함구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돌아왔는데 기도를 하던 중에 그 때 제 마음에 상채기가 났다는 사실을 성령께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쓸쓸하게 그러면서도 이해를 구하며 말했습니다.  “다 아시지요.”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모습에서 향유 옥합을 본다.  그런데 그 옥합이 예수의 발 앞에까지는 드려졌지만 여전히 깨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으려 하는구나.”  

그 말씀에서 깨어지지 않은 내 자아를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발밑까지는 갔지만 정작 깨어져야 할  때 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나의 자존심을 본 것입니다.  자존감 때문에 존중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 안에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에 마음의 상처가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속에서 깊은 흐느낌이 흘러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지적하심 가운데 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요.  애통하며 하나님 앞에 다짐했습니다.   “하나님 여전히 깨어지지 않은 부분들을 봅니다.  저의 옥합을 깨기를 원합니다.”

예수의 발 앞에 드려졌어도 옥합이 깨어지지 않으면 향기를 발할 수 없습니다. 옥합이 깨어져 안에 있는 향유가 다 흘러나올 때에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저를 감싸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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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다른 환경 속에서 선교사로 살기 위해서는 낮아짐이 요구된다.  특히 다양한 문화가교차하는 MIU라는 특수환경 속에서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많은 교수 사역자들이 몰이해나 오해 속에 놓이는 자신의 모습을 쉽게 보게 된다.  특히 이 상황 속에서 리더로 섬기기 위해서는 묵묵히 아픔을 견디는 것이 필요함을 본다.  선교사이기 때문이다.  절대로 반격해서는 그들을 얻을 수 없다.  맞고 또 맞으며 견딜 때 그들 치는 자들의 마음에 변화가 오는 것이다.  학교의 왕충은 선교사가 말한대로 하나님이 낮추실 때, 충분히 낮추는 것이 중요함을 본다.  권오문 선교사의 말처럼 오해를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까지 인내하며 낮아지는 것이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대부분의 경우 상처난 자아에 대해 주어지는 성령의 위로는 찔림과 함께 온다.  우리가 그 찔림을 받아들일 때 그래서 내 안에 남아있는 껍데기가 도려내어질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부어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죄많고 하나님의 거룩과는 거리가 멀어 있을 때가 많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에게 임재하실 때 우리에게는 찔림이 함께 주어진다.  구약의 모든 위로의 예언과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 폐부를 깊이 찌르는 말씀과 함께 주어졌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있어서 깊이 기도하는 가운데 어떤 생각이 임할 때 그 생각이 거룩함의 칼과 안위의 손길 이 두가지로 함께 임하곤 하심을 경험한다.  성령의 임재는 거룩함의 칼로 우리를 찌르실 때, 그 찔림 가운데 애통하는 가운데 비로소 세상에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위로가 하늘로부터 임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찌르심은 원하지 않고 위로만을 원할 때가 있다.  성경 말씀 가운데 그저 축복의 말씀을 담은 구절만을 따서 그것을 늘 곁에 두고 위안을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위로는 찔림과 상함과 더불어 임한다.
성령이 부어진다고 우리에게 평안과 형통만이 쏟아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거룩함의 임재 앞에 세상과 나의 욕구를 보며 변하지 않는 내 모습에 대해 좌절하고 갈등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갈등 가운데 십자가를 바라보고 걸어가려 방향을 정할 때 그 때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는 위로와 평안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포기한 순종의 행위는 그의 자손으로 태어날 예수님이 결단하셔야 했던 처절한 포기의 예표가 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오르시기로 결정하시면서 모든 것을 버릴 준비를 하셨다. 당신의 인격이 존중되는 것을 포기하셨다. 환호하던 사람들이 돌변해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온갖 멸시의 말을 퍼붓고 침뱉고 따귀를 때리는 순간에도 이 모든 것을 묵묵히 당하셨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였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나의 것을 내려놓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의 포기가 우리의 승리와 구원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  예수님의 내려놓음을 통해 하나님이 또 다른 이들을 향한 구원의 문을 열어 가셨듯이 우리의 비움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른 이들의 구원의 문을 열어가시는 것이다.

soo

2005.11.12 13:58:13

용규 집사님 수경인데요..
가끔 힘들때 이곳에 들르고 싶은 맘이 생기는데요..항상 힘을 얻고 돌아가네요.. 보고싶어요..동현이두요^^.보스턴은 언제오실까요??

이용규

2005.11.16 09:47:40

수경이구나. 이제야 컴퓨터 열어보았다. 보스턴은 언제 갈지 기약이 없어. 단 내년에 미국에 갈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관절염으로 고생한다는 이야기 들었는데. 기도해서 고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깨끗한 영혼과 몸을 위해 기도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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