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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이나 생명 그리고 가족의 안전에 대해 하나님께 의뢰하고 그 분의 계획을 신뢰하는 것은 이미 유학시절부터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훈련시켜 오셨던 것이다.  아내와 나는 불안요소가 더 많고 사회적 보장 장치가 갖추어지지 않은 사회에서 살면서 이 부분을 더 많이 내려놓고 깊이 묵상하게 되었다.  

김우현 감독님을 포함한 팔복팀이 올해 추석 기간에 몽골을 방문했다.  오기 전에 김우현 감독에게 몽골에서 순교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다.  2000년 여름 몽골에 온 단기팀 중 두 팀에서 순교자가 나왔다.  
한명은 김성호라는 청년이었다.  송천 감리교회 목사님의 아들로 외항 선교회와 연결되어 아르항가이라는 몽골 중앙부에 위치한 아이막(우리 행정 개념으로는 도에 해당)의 교회 지붕을 수리하던 중 감전사고로 사망했다.  당시 팀원중 한 명이 마침 지붕 수리 장면을 촬영하고 있던 중이라 감전되어 떨어지는 장면이 비디오에 남았다고 한다.
또 다른 팀은 예수전도단 산하의 킹스 키드라는 팀이었다.  몽골 북쪽 다르항이라는 제이의 도시에서 북쪽으로 한시간 반정도 차로 가면 도착하는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미전도 종족 선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강을 건너다가 팀원 중 두 명이 강물에 떠내려가 사망하는 사건을 맞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 단기팀을 인도했던 리더들은 깊은 충격과 좌절의 시간을 가졌다.  그 후 김우현 감독의 “애통하는 자” 비디오를 보면서 그들의 애통 뒤에 숨겨진 천국의 코드를 감지하고 위로를 받았다.  그 분들이 김우현 감독을 만나 당시 정황을 나누고자 했는데 마침 김우현 감독이 몽골을 방문하겠다고 내게 연락했던 시점이었다.  

그 무렵 나는 3년전 몽골 땅을 방문했을 때 경험했던 것이 떠올랐다.  당시 알지도 못하던곳에서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기도시켰던 것에 대해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당시 나는 아르 항가이를 여행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초원을 바라보다가 문득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예배의 갈망이 나를 사로잡아서 찬양을 시작하려던 순간, 몽골 가요를 틀어놓고 듣던 차의 운전사가 갑자기 테이프를 틀었다.  경배와 찬양팀의 찬양집 중 하나였다.  내 마음 속의 예배를 그 테이프의 찬양이 도와주었다.  드넓은 초원에서 찬양을 따라 예배하면서 감격에 충만해졌다.  
얼마 후 우리를 태운 차는 아르 항가이 아이막의 한 작은 솜(군에 해당하는 행정단위)의 중앙부에서 멈춰섰다.  시동이 꺼진 채 다시 걸리지 않는 것이다.  예배 중이던 나는 주변을 둘러 보았다.  마을 전체가 한 눈에 보이는 장소였다.  게르(몽골 전통 가옥)가 한채 한채 내 눈에 와서 박혔다.  나는 그 마을의 한 가구 한 가구를 놓고 중보기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마지막 게르를 위해서 기도를 마쳤을 때, 차가 시동이 걸렸다.  
나는 왜 성령께서 그 마을을 위해 중보하기를 원하셨는지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지역은 김성호라는 감리교 형제가 죽은 곳에서 멀지 않은 지역이었다.  울란바아타르에 돌아온 후 막 몽골에 입국하신 김종진 목사님을 만났다.  그 분은 김성호 순교자를 기념하는 교회를 맡기 위해서 파송받고 들어오신 것이었다.  내가 중보 기도했던 그 솜이 속한 아르 항가이의 주도에 김종진 목사님이 교회를 세우실 예정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애통, 그리고 의에 목마름이 부흥의 키워드임을 암시해 주는 사건이었다.      

팔복팀과 함께 김성호 순교자가 묻혀있는 묘소를 찾았을 때, 우리는 갑자기 불어닥친 눈보라 때문에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떠나기 마지막에 가까스로 우리는 무덤을 찾을 수 있었고 기도하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킹스 키즈팀이 사고를 당한 현장에 가서 함께 기도하고 촬영하는 시간을 가졌다.  함께 간 이레교회의 청년들은 그들이 자신들을 섬기기 위해 이 땅 가운데 와서 그들의 생명을 내려놓은 것에 대해 감사하는 기도를 했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의 죽음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신다.  이러한 죽음이 승리가 되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안식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소망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가짜 신자로써 살아갈 수 밖에 없다.

팔복팀이 몽골에 방문해서 우리 가정에서 식사할 때 아내에게 물었다.  아파트 들어오는 입구가 많이 어둡고 위험하게도 보이는데 혹 나쁜 사람 만나면 봉변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느냐는 것이다.  아내의 대답은 간단했다.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지요.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다 이유가 있게 마련이지요”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사람은 이 사명이 다 할 때까지는 하나님이 데려가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는다.  설령 우리를 데려가신다고 하더라도 그 때가 하나님의 가장 완벽한 타이밍임을 신뢰한다.  

몽골에 있으면서 양과 염소의 차이에 대해 묵상할 기회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시겠다고 한다.  양은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존재를 상징한다.  염소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백성이다.  
양과 염소의 차이는 죽임을 당할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양은 죽임을 당하는 것을 알아도 전혀 반항하지 않는다.  목이 칼에 베어 피가 내장으로 흘러들어가는 순간까지 (몽골에서는 양을 잡을 때 피가 밖으로 새지 않고 내장에 고이게 한다) 반항하지 않는다.  그저 그 선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며 조용히 숨을 거둔다.  
염소는 죽기 전에 심한 저항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보통 성인 남자 두 명 정도가 가서 염소를 붙들어서 다리를 묶어야 한다.  죽을 때 심하게 괴성을 지르며 몸을 바둥거린다.  그래서 염소를 잡으면 동네 사람들이 다 알 정도다.
양과 염소의 죽는 모습 가운데 신자와 비신자의 모습이 드러난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최후 또는 극한 상황을 맞이하는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양인지 염소인지를 분별시켜줄 것이다.

특별히 나의 가족과 관련된 안전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최근 규장에서 출간된 “애통하는 자”와 한재성 선교사님의 글을 접하면서 사랑하는 자를 잃어버리는 것이 주는 두려움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가족의 안전과 관련해서 하나님께 그 두려움을 온전히 맡기는 것에 대해 묵상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다.  아래의 두 글은 이에 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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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연이는 요즘 밖에 나가서 노는 것이 너무 재미있나 봅니다.  방학이라 아침 먹고 나가서는 점심 먹는 것도 잊고 오후 늦게까지 놀려고 합니다.  저희 동네에 외국인이라고는 우리 식구 밖에 없기 때문인지 동연이와 서연이가 놀이터에서 인기가 좋습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철에 우리 동네에도 그럴듯한 놀이터가 생겼습니다.  여름이 되면서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바글거리고 놀지요.  서연이가 가면 달려들어 뽀뽀하려는 남자 애들이 생겼고요.  동연이는 새로운 유기오 카드 놀이를 하거나 같이 놀아줄 형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어제는 교회 리더를 초청해서 식사 대접한 뒤 늦게 동연이를 찾아보니 놀이터에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황해서 동네 아이들과 사찰집사님을 동원해서 동네를 뒤졌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기에 결과에 대해서는 걱정보다는 평안함이 있었지만 그래도 걸음이 분주함을 느꼈습니다.  

형들을 따라 아파트 건너편에 놀러갔다가 돌아온 동연이를 보고 눈물빠지게 야단을 쳤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그저 돌아온 아들을 향해 두 팔 벌리고 안아주었을 뿐이지만 이 부족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야단부터 쳤지요.  그러고는 왜 혼나는지에 대해 동연이에게 이해시키는데 한참이 걸렸습니다.  

며칠 전에 중국에서 박태윤 목사님으로부터 받아온 "셀라"의 찬양 씨디를 들으면서 그 찬양집의 배경을 동연 엄마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들의 할아버지가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다가 순교하셨는데 그 아버지가 하던 일들을 다 내려놓고 그 분의 뒤를 잇기 위해 아프리카로 들어가서 선교한 이야기,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자라면서 선교사의 영성을 가지고 그들이 찬양하게 된 이야기, 그들이 비록 단순히 피아노에 육성으로 다 아는 평이한 곡들을 찬양함에도 불구하고 미국 씨씨엠계를 강타하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해주었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동연이가 물었습니다.  "아빠, 선교사가 죽는거야?"  아마 아빠 엄마가 그리고 친구들의 아빠 엄마가 선교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물은 것이겠지요.  저는 대답해 주었습니다.  

"응, 선교사는 죽을 수도 있는 거야.  죽더라도 기쁨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거야.  아빠랑 엄마는 선교사쟎아.  그렇지?"
"그러면 나는?"
"맞아 동연이도 선교사지!  우리는 모두 다 같이 선교사야."  

이렇게 대답하며 조심스럽게 그의 표정을 읽으려 했습니다.  동연이는 밝게 웃으면서 뿌듯해 하더군요.  아빠 엄마랑 같은 존재라는 것이 그를 기쁘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연아 너 선교사 되는 것 좋아?  죽는 것 안 무서워?"
"죽으면 천국에서 다 같이 만나쟎아요!"

동연이가 아직 죽음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언젠가 들었을 하나님 나라에 대해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보고 기뻤습니다.  

동연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도 저는 동연이를 잃는 것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이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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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파송 교회인 케임브리지 연합 장로 교회에서 제 후배 유광훈 집사 부부가 몽골에 와서 저희 집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서울 대학교 시절 과 기독인 모임을 시작했을 때부터 줄곧 같이 지내며 제가 간 길을 유사하게 밟아온 그래서 하버드에서 몽골 제국사 공부를 하는 후배입니다.  

스케쥴 사이를 비집어서 그 부부와 뭉크 그리고 툭수와 함께 남해 차로 아르 항가이 지역으로 2박 3일 여행을 갔습니다.  역사 유적지를 둘러보고 오기 호수에서 수영도 하고 투르크족 빌게 카간의 비문이 있는 근처 마을에서 하루를 쉬었습니다.  저녁이 되어 유목민의 말을 빌려 말타려고 했습니다.  이 말들은 사람들을 많이 태워보지 않아서 무척 드세고 거칠었습니다.  말타본 경험이 적은 광훈이의 경우 걱정이 좀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말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서 뛰는 터에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다행히도 다리 한 쪽이 땅에 닿은 상태로 엉덩이가 땅에 닿았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보았습니다.  다행히 말에 밟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가가 보니 정신을 잃고 혼절해 있었습니다.  급히 응급조치를 하고 보니 1분여 있다가 정신이 들었는데 자기가 왜 그곳에 있는지 몰라했습니다.  1분 동안 3일 정도에 해당하는 사건들이 환상으로 지나갔었던 모양인데 한 동안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인인 재원씨를 울리고 말았지요.  하지만 다행히 20-30 분 후에 기억이 정리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두 부부는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더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제 함께 예배하면서 우리는 나를 포함한 가족들의 죽음에 대해서 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의탁하는 자유함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내려놓을 때 진정한 평안이 우리를 감싸고 더 이상 사탄은 우리의 두려움을 이용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몽골에 있어서 안전하지 못하고 미국이나 한국에 있기 때문에 안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가장 안전한 삶이라고 다시 한 번 고백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예배하면서 이 부부에게도 몽골에 대한 소명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위기 상황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또 우리를 극적으로 인도해 가심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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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이 부부는 낙마 사건 이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또 하나의 사건을 목격했다.  우리 앞서 가던 차가 사람을 치었는데 길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몽골의 험한 운전 환경을 보면서 더욱 낙담과 두려움이 밀려왔던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내 주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의지할 때에만 우리 안에 평안이 임한다.  세상이 빼앗아갈 수 없는 평안 말이다.

지난 봄에 부산의 금정교회 담임 목사님께서 선교회의 선교 프로그램을 말씀으로 섬겨주시기 위해서 몽골 이레교회를 방문하셨다.  그 분과 함께 울란바아타르에서 두 시간 떨어진 지역에 알고지내던 목동 집에 갔다.  그 목동 집에서 전도하고 예배하려고였다.  예배 후 목동집의 말을 잠시 빌려타려고 했다.  목사님께서 말위에 오르셨는데 말이 갑자기 달렸다.  목사님은 말을 어떻게 세우는지도 모르시는 분이었다.  우리는 갑자기 벌어진 사태를 보면서 그저 안타까운 소리만 낼 뿐이었다.
거칠게 달리기 시작한 말은 다행히 경사진 산쪽으로 내달았다.  감사하게도 목사님은 그 때까지 안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산기슭에 닿아 말은 멈추었고 목사님은 발을 빼서 말에서 미끄러지듯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올 수 있었다.  달리는 말에서 떨어졌으면 위험했을 상황이었다.  
얼마 후 목사님께서는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몽골로 부르신다고 느꼈다.  원치않는 곳으로 하나님이 이끌어 가심을 느꼈고, 몽골에 대해 깊이 기도하게 되었다.  결국 목사님께서는 담임하시던 교회를 내려놓고 몽골 선교사로 들어오시기 위해 준비하기로 결정하셨다.  그 분의 안전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 분에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안전의 문제를 주님께 의탁하고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내어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안전에 관심이 많으시고 또 우리를 소중하고 존귀히 여기시기 때문에 우리의 안전의 문제를 맡기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사탄은 우리가 가족의 안전 문제만은 자기가 움켜쥐도록 두려움 가운데 몰아가지만 우리가 이 부분을 주님께 맡길 때 우리는 자유함 가운데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용규

2005.11.05 12:53:07

내용을 약간 업데이트했습니다.

서지영

2005.11.05 17:32:48

송천교회 김종진 목사님과는 이미 알고 계셨군요. 여기 있는 글들을 성실히 읽진 못했지만, 대목대목 아버지의 세세하신 인도하심을 목도하며 놀라고 있습니다. 몽골 땅 위에 임하시는 아버지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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