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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와 변명

조회 수 15508 추천 수 0 2006.08.25 14:09:22
귀한 사역을 감당하고 계시는 선교사님 부부께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한국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평신도입니다. 근간 선교사님의 귀한 책에 관한 제 독후감으로 인하여 혹시라도 선교사님께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어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먼저, 제 글로 인하여 선교사님께 부담이 되었다든지 아니면 이 홈을 사랑하시는 성도님들께 혼란을 초래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솔직한 심정입니다만 선교사님의 책은 참으로 오랜만에 경험한 은혜와 도전의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유명한 국내외 교계 지도자들의 책을 읽더라도 접하기 어려웠던 참 신앙의 모범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근 제가 읽었던 경건서적 중에서, 더글라스 웹스터 목사님의 ‘낮아짐’과 쌍벽을 이룰 정도의, 아주 좋은 책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이런 좋은 책에 대하여 반감을 가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정말로 선교사님의 책과 그 내용에 대하여 공감하며 동의합니다!

다만, 제 독후감의 별지로 다루었던 부분은 매우 민감한 주제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의견 또한 분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따라서 이 주제를 가지고 논쟁하려 한다면 결론이 나지 않음은 차치하고라도, 전혀 덕이 되지 못함을 부인할 수 없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이 문제는 더 이상 깊이 다루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문제는 제기되었습니다. 비록 논쟁목적은 아닐지라도, 단순한 변명 차원에서라도 간략히 제 견해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선교사님의 보충말씀처럼 성도에게는 판단권이 없습니다(여기서 성도란 목사와 학자들을 포함한 믿는 자 모두를 의미합니다). 성경이 밝히는 바에 의하면, 판단권(특히 최종 판단권)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고유권한입니다. 아주 기초적인 내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판단권과 선택권을 혼동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성경을 깊이 읽어보면 선택권만큼은 하나님의 소관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의 책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선악과를 선택할 수 있을 정도의 거의 무제한적인 권한이기도 합니다. 이 선택권은 단순히 현실적인 부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분야에서도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분별’입니다! 영분별 -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요?

신학적 교리적으로 다양한 설명들이 가능할 것입니다만, 지금까지 성도들에게 이 영분별의 책임 역시 지도자인 목사와 학자들의 고유소관인 것처럼 잘못 가르쳐져 왔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신앙의 모든 것은 지도자들의 책임이고 평신도는 지도자들이 먹여 주는 것을 단순히 받아먹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따라서 평신도의 임무는 무조건 지도자에게 굴종하는 것이면 충분하다는 설명들이었지요(물론 이것은 천주교의 교리입니다. 이것을 개신교가 아무 비판없이 수용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엄청난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고요).

바로 이러한 시각차입니다! 길게 말씀드리기 뭐하므로 한 마디로 말씀드립니다. 저는 영분별의 임무는 목사와 평신도 모두에게 절실한 은사이지만,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평신도에게 더욱 중요한 은사라고 확신합니다. 구약의 선지서들과 신약의 서신서들을 읽어보면 ‘거짓 선지자’에 관한 경계의 말씀들이 무수히 나오는데, 이는 영분별 은사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도자들이 따르는 자를 절대로 속여서는 안 된다고 엄히 경고하십니다! 만약 속이면 그 죄 값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눅11:52 및 마18:6).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속는 자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지도자의 잘못된 인도를 그대로 수용한다면 따르는 자 역시 구덩이에 빠집니다. 인도 받는 위치라고 해서 책임을 면제받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어려운 점입니다. 평신도가 신앙의 모든 것을 지도자에게 맡겨 놓을 수 없는 성경적 근거인 것입니다. 따르는 자는 비록 제한적일망정, 나름대로의 선택기능을 활용해야만 합니다! 이 선택기능의 상실의 예가 바로 이단에 빠지는 경우입니다. 이단에 빠진 성도들이 최소한의 선택권(성경에 비추어 보는 것)이나마 행사했더라면 그들은 보다 쉽게 그 악의 구덩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위 정통교파라는 부류에 속했다는 것만으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정통의 옷을 입고도 성경적 신앙과 배치되는 사례가 주변에 비일비재합니다. 이럴 때도 건전한 선택은 필수입니다. 선택의 실패에 따르는 값은 성도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지옥과 연계되기 때문입니다).

지도하는 자와 인도 받는 자의 성경적 위상을 정확히 정의하기 쉽지 않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어떤 신학이론이든, 지도자와 따르는 자의 차별을 주장하는 이론은 반대합니다. 우리 신앙 안에는 잘난 자와 못난 자의 구별이 없습니다(세상종교에는 반드시 성직자 계급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별도의 성직자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쉽게 ‘지도자에게 무조건 순종해야 하고 지도자의 잘못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판단하실 일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후반부(하나님의 판단)는 옳습니다. 그러나 전반부(지도자에게 무조건적인 순종)는 신중하게 수용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아닐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아니다.’의 상황에서의 행동원리입니다. 위의 말은 ‘아닌’ 상황에서도 모른 척하고 따르라는 의미가 됩니다(아무리 변명하더라도 방임 수준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저는 명백히 반대하는 것입니다.

‘아닌’ 상황이라면 ‘아니다.’라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 상대가 비록 목사라 할지라도 반드시 말해 주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말해줘도 모르는 경우입니다(평신도가 말해서 목사가 알아듣는 경우라면 그러한 상황으로 이끌지도 않겠지만 말입니다).

이 경우에 처했다면, 이때부터 비로소 선교사님의 주장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평신도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무엇일까요? 예, 떠나는 것입니다. 평신도가 지도자를 떠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같이 있으면 함께 망하기 때문입니다(이단을 참조하십시오).

그런데 교회 옮겨본 경험이 있으신 성도님들은 그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며 그 후유증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 잘 압니다! 목사님들은 경험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엄청난 상처가 됩니다.

자, 지금까지 장황하게 말씀드렸습니다. 문제가 되는 주장(목사에게는 무조건 순종하고 하나님께만 맡겨라)의 숨겨진 위험성을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제 독후감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이 주장은 모든 목사님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면피용이라고 표현했었습니다). 역시 독후감에 기술된 것처럼, 이 주장은 ‘영적으로 미성숙한 성도들이 더 성숙한 목사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의미가 되므로 지극히 비논리적입니다. 또한 힘없는 자가 힘 있는 자를 모셔야 한다는 뜻이 되기에 역시 비성경적입니다(제가 이를 ‘굴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숙된 자가 어린 자를 보살피고 섬기라고 분명하게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성경적인 견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무조건적인 목사 순종’ 이론을, 성경이 말씀하시는 지도자와 따르는 자가 당연히 수행해야 할 본연의 역할을 뒤집는 ‘역할전도현상’에 다름 아니기에, 저는 반대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영적으로 더 성숙한 목사님들이 덜 성숙한 성도들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성숙한 자라면 결단코 ‘권위나 순종’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킬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가 양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 많이 양보하고 더 많이 힘들고 더 많이 애써야 할 분은 평신도가 아니라 목사님들이십니다! 이것은 싫으면서 존경 받고 싶은 마음이 충만하신 분이라면 목사직임을 맡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세상이 말하는 바로 그 ‘출세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 때문에 쓸데없는 이야기를 길게 했습니다.

일부러 사악한 영이 되고자 하는 성도는 없습니다. 거의 모두가 지도자들로부터 극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이런 몸부림이나마 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이 상태(상처받은 성도들이 존재한다는 상황)에서 상처를 준 당사자들은 무어라 변명하실까요? “내가 비록 상처를 줬다 해도 이건 하나님께서 물으실 사항으로서 너는 아무 말도 할 자격이 없다. 그러니 너는 찍 소리하지 말고 그냥 내게 복종만 해라!” - 이것이 선교사님 견해의 진짜 의미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목사님들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게 너무 안타까워 이렇게라도 외쳐 보는 것입니다.

평신도들(지도하는 자들에 대비되는 따르는 자들)의 애환을 욥의 하소연으로 대신하며 마치겠습니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욥19:21). 욥이 친구들에게 간절히 원했던 것은 그의 아픔을 이해하는 긍휼이었습니다! 대책 없는 오만함으로 천국 문을 찾으려 애쓰는 평신도들을 윽박지르기에 여념 없는 목사님들께 읍소합니다. “목사님들, 제발 영적으로 억눌리고 있는 평신도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상처받은 성도들이 목사님들께 간청 드리는 것은, 허황된(대접받겠다는 욕심만 반영된 것이기에 허황된 것입니다) 신학이론을 근거로 무자비하게 짓눌러 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성경 그대로 평신도를 긍휼히 여겨 달라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들어 주십시오!  

선교사님!
선교사님의 경우는 제가 반대하고픈 사례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선교사님을 본받을 수 있는지가 더 궁금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범적인 예를 가까운 주변에서 발견할 수 없기에 그 안타까움을 하소연하였다는 것이 바로 제 글의 진정한 속내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억압받아 고통당하고 있는 평신도의 애환임을 양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님의 모범에 관하여는 진심에서 울어나는 감사의 마음을 다시 한번 전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선교사님의 사역 위에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샬롬!

※ 추신 : 이 글은 논쟁목적의 반론이 아닙니다. 따라서 선교사님께서 성도님들께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하신다면 직권으로 삭제하셔도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최재혁

2006.08.25 18:08:39

혹 선교사님께 누가 될까봐 아니면 소모적 논쟁으로 이어질까봐 염려하는 정순태님의 마음이 전해집니다. 제가 읽기엔 처음부터 선교사님에 대한 감사와 감동의 글이었기에 여기에 옮겨왔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 합니다. ^^
또한, 그동안 존경할만한 목자들만을 만나온 저로서는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한가지 더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이용규

2006.08.26 08:30:33

목회자에 대한 상처가 많이 있으셨나 봅니다. 참 마음 아픈 일이지요. 평신도와 목회자의 강한 구분은 한국 교회에서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고 (제 생각에는) 유교적인 영향 때문인 것 같습니다.
목회자로 인해서 상처받고 울고 있는 많은 분들께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울러 진 에드워드의 "세 왕 이야기"가 그런 분들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실은 저도 요즘 이 책에서 다룬 주제를 가지고 다시 한 번 씨름하고 있는 중입니다. 참 중요하면서도 쉽지 않은 과정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승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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