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성탄 기간은 제게 참으로 남다른 기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매 해 성탄을 보냈지만, 이번 해처럼 12월 내내 (자의반 타의반) 성탄 분위기에 계속해서 젖어 있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네요.
저로서는 감사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경험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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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있을 때나 몽골에 있을 때나 성탄절 하면 이브에 축하 행사 또는 노방 전도 하나, 그리고 성탄절 예배,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 전부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성탄에는 정말 행사가 많았네요.
애들 다니는 학교에서 성탄 파티,
스틴 신학교 성탄 축하 예배,
반둥에서 기독교 및 회교도 청년들이 함께 모여 성탄을 축하하는 모임,
연합교회에서 성탄 전야 축하 행사 및 성탄절 예배,
그리고 현지인 예배 모임에서의 성탄 축하 행사까지…
그 외에 이런 저런 사적인 모임까지 더하면…
벌써 몇 번이나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했는지 모르겠네요… ^^;
우리 예수님 많이 축하 받으셔서 기쁘셨으려나요? @.@?
아님 당황하셨으려나요? ^^;
그 많던 축하의 횟수만큼 제 마음도 충분히 그 분의 탄생을 축하하고 있었어야 할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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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성탄 축하 기간동안 특별했던 것 중 하나는 인도네시아의 크리스천들이 성탄의 의미를 잃지 않고 진심으로 성탄을 축하하기 위해 곳곳에서 알게 모르게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아래 사진을 한 번 보세요.
아이들 선물 사러 어느 쇼핑몰에 갔다가 발견한 성탄 트리입니다.
아마도 크리스천 작가가 만들어서 전시해 놓은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까이 보시면 마구간 바닥과 가시 면류관 컨셉으로 트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작품 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Not Every Christmas Tree Has A Shining”
(모든 크리스마스 트리가 빛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는 이 트리를 보면서 매우 큰 감동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고난을 이토록 극적으로 엮어서 표현하다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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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나 장소마다 울려 퍼지는 캐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직접적으로 축하하는 캐롤이나 복음적인 곡들을 계속 틀어 놓는 곳도 있었는데,
그런 곳에 들어가면 어찌나 마음이 평안하고 따뜻하던지요…
아마 캐롤 선곡자의 믿음과 소망이 제게도 전해졌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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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은 아니지만, 특별히 이번 성탄 기간 동에 제 안에 계속해서 맴돌았던 찬양이 있었습니다.
성탄 전야 축하 예배 때 어린이들이 앞에 나와서 이 찬양을 불렀는데,
그 합창 찬양을 듣던 제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가 오신 이유]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순종의 눈물
온 세상 다시 빛나게 한 생명의 눈물
그가 이 땅에 오신 이유
죽어야 살게 되고
져야만 승리하는
놀랍고 영원한 신비
지으신 그대로 회복시킨
우리의 창조주 그리스도
십자가 길로 아버지 뜻 이루셨네
그가 이 땅에 오신 이유
“죽어야 살게 되고, 져야만 승리하는, 놀랍고 영원한 신비” 라는 가사가 제 가슴을 통타했습니다. (마 16:25)
아마도 바로 그 전 주에 수라바야(인도네시아 제2도시)에 출장을 다녀온 터라 더 그랬던 것 같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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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바야에서 ‘사랑의집’이라는 구제사역 기관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돌보며 영적인 사역도 감당하는 기관이었습니다.
그 사역을 20여년 간 이끌어 온 ’Mrs. H’라는 분의 간증이 놀라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긍휼(compassion) 사역 및 회교도와의 화해(reconciliation) 사역으로 부르셨을 때, (당시 50세)
(수라바야가 속한) 자바 동부 지역에서는 당시 교회에 대한 핍박과 물리적 공격이 존재하던 시기였고,
자기는 1크리스천에, 2여자에, 3중국계에 (인도네시아 회교권 기준으로) 온갖 핸디캡을 다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고,
회교도 형제들을 찾아가 “당신들은 우리의 형제”라고 고백하며,
여러 경로를 통해 그들에게 사랑을 나타내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20여년 간 사역해 오다 보니,
하나님께서 그 지역 사람들의 마음을 많이 풀어 주시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교회에 대한 공격은 점차 사그라들었으며 최근 들어서는 그런 안타까운 소식이 더 이상 들리지 않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최근에 이 기관에서 어느 지역에서 부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사역 센터를 세워가고 있는데,
그 사연이 참으로 기구합니다. ..
전에 그 부지에서는 크리스천 학교가 이미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지역 주민들이 그 학교의 존재에 대해 반대하기 시작했고,
결국 학교는 자신들의 건물을 비워둔 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오랜 기간 그 건물은 페허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어느 독지가의 도움으로 ‘사랑의집’에서 그 터를 다시 사들이게 되었고,
폐허가 되었던 건물은 리모델링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새롭게 새워지고 있는 센터에서 무료 진료소 및 치과, 농업 개발 훈련 프로그램, 어린이 교육 등을 감당하며 그 지역을 섬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쫓겨난 기독교학교 터를 사들여서 구제사역센터를 세우고 그 지역 주민들을 다시 섬기길 원한다?’
정말 그런 믿음과 사랑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실제로 그 지역에는 왜 기독교기관이 우리 지역에 들어와 있냐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얼마 전 그 지역 대표가 “‘사랑의집’은 우리 지역에 꼭 필요하다”며 활동을 지지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까지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을 해야하는 사명…
그 사명을 이어가고 있는 ‘사랑의집’의 모든 사역자들이 정말 대단하게 보였습니다.
..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좀 억울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앞의 찬양 가사처럼 왜 우리는 늘 져주어야 하는가?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릴 반대하고 밀어내도 여전히 바보처럼 그들을 사랑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공격 당할 수는 있지만 공격해서는 안되는가?
물론 머리로는 다 이해 되는 말들이고,
또 그렇게 했을 때에 실제로 승리가 주어진다는 것에 대해 여러 차례 직접 경험도 했지만,
여전히 제 마음 한 구석에 응어리진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주님께서 그 부분을 풀어 주셨습니다. ..
성탄절 예배를 마치고, 그간 교회에서 식사 준비로 섬기느라 수고한 몇몇 현지인 분들과 나들이를 가게 되었습니다.
자카르타 북부 바닷가로 바람도 쐴 겸 그 분들 위로도 할 겸 잠시 다녀오게 되었는데요,
마침 저희 재단 공용 차가 비어 있어서 제가 운전을 하게 되었지요…
바닷가 근처 공원에서 두어 시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제가 어느 길목에서 좌회전 후에 바로 차선을 바꾸었는데,
그 앞에서 경찰이 나타나더니 도로 한 가운데서 저희 차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방금 전에 차선을 변경하면 안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아마 좌회전 직후 차선이 흰 점선이 아니라 흰 실선이었나봅니다. ^^;
아무튼 교통 법규를 위반했으니 운전 면허증을 압수하겠고, 15일 후에 ㅇㅇ법원에 출석해서 즉심 후 벌금을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곧이어 경찰이 하는 말이, 오늘이 크리스마스고 좋~은 날이니까 자기가 ‘호의’를 베풀 터이니,
자기에게 벌금을 대신 내면 자기가 전달하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뒤에 앉아 있던 상황을 지켜보던 현지인 분들은 아마 제가 상황 파악을 잘 못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는지,
손짓 발짓을 해가면서 제 귀에다 대고 속삭이고 난리가 났습니다.
자기네끼리 꾸물꾸물 돈을 모아서는 언능 경찰에게 주라면서 제 손에 쥐어 주더군요. ㅎㅎ
저는 그렇게 뒤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분들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는,
경찰과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저..기.., 법원에 출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제가 장소를 잘 모르니, 여기다 주소를 적어주실 수 있나요?”
그 와중에 (경찰이 저희를 도로 한 가운데에서 잡은 덕에) 제 뒤로 차가 엄청 밀리기 시작했고,
그 경찰 분도 예기치 못한 저의 반응과 체증 상황에 점차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뒤에 밀린 차들과 제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정말 법원 출석하겠냐며, 그러면 벌금 액수가 많아진다면서 몇 번 얼버무리기를 거듭하더니,
“오케이, 오늘 정말 좋은 날(크리스마스)이고 하니, 제가 당신들을 봐드리겠습니다. 면허증을 돌려드릴테니 안녕히 가십시오.”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참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렇게 상황을 모면하고는 다시 핸들을 잡고 길을 달리는데,
방금 경찰관 분이 “오늘 정말 좋은 날” 이라고 말했던 일이 제 머리 속으로 되뇌어지면서,
제 마음 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아, 결국 예수님 덕분이었구나!’
면허증을 압수당해도 마땅한 상황에서 (실제로 저는 교통 법규를 위반했지요) 저를 구원해 주신 것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 분은 저를 죄로부터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일상의 문제로부터도 구원하신 것이지요.
그 분이 태어나신 것을 기념하는 날에 제가 그 분 덕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묘했습니다.
순간 제 마음 속에 한 없는 감사와 찬양이 넘쳐났습니다.
이 에피소드를 겪으며, 왜 우리는 악에게 지지 않되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하는가? (롬 12:21)
그 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 분이 먼저 우리에게 져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분이 그 분 아닌지요?
누군가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는건 ‘내가 네게 모든 것을 져주마’ 라는 뜻과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그 분은 참으로 우리에게 모두 져 주셨습니다.
그 분이 두 팔 벌려 매달리신 십자가는 우리에 대한 항복의 표시였습니다.
그렇게 그 분은 우리의 악을 그 분의 선함으로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 져 주기까지 어떻게 보면 극단적이기까지 한 바로 그 선함 때문에 그토록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던 우리의 자아가 그 분 앞에 다 부서져 엎어지고 꼬꾸라졌으며,
우리는 우리의 바로 그 자유의지를 드려, 그 분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분은 져줌으로서 다 이기셨고,
그렇게 모든 사람을 다 얻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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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사회의 부조리와 맞닥들이게 됩니다.
특별히 인도네시아라는 땅에서 외국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사업이나 사역을 하다 보면,
어디까지 어떻게 타협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직하고 싶지만 정직할 수 없을 것 같은 매우 당황스러운 상황과 맞닥들이게 되기도 합니다.
가만히 당하고만 있으면 안될 것 같은, 그래서 나도 스스로 무슨 수를 쓰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을 것만 같은 급박함이 몰려 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
우리는 져야만 승리하는 그 신비를 직접 경험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만이 아니라 내 삶 가운데에 이 신비가 이뤄지는 것을 직장에서 가정에서 직접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는 문제 해결에만 맞춰져 있는 나의 초점을 과감히 들어내고,
그 시선을 더하기 모양의 십자가의 한 중심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위에 누가 달려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거기에 양 팔 벌려 달리신 예수님이 보이게 되고,
그 위에 겹쳐져서 함께 달려 있는 나도 보이게 됩니다.
질 각오를 하고 양 팔을 벌려 그 상황 가운데 또는 그 사람에게 나를 맡기면, (요 21:18)
어느새 크게 벌린 내 두 팔 안에 들어와 있는 승리를 보게 됩니다.
..
제가 몽골국제대학교에 있을 때의 이야기인데,
저희 학교가 교육부 인증(accreditation)을 위한 감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학교는 열심히 준비를 했고, 결전의 날이 다가와서 담당관들이 와서 학교를 둘러 보고 돌아갔는데,
결과는 불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년도에 다시 준비해서 감사를 받게 되었지요.
결과는 재차 불합격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일하는 우리 모두는 리더십에서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인증을 쉽게 받을 수 있는지 말이지요.
우리 학교 자체의 퀄리티를 높이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어느 정도 되었다고 생각된다면, (당시 인증을 위한 커트라인 점수는 불과 60점이었습니다.)
담당관들에게 몇백 불만 쥐어주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큰 돈도 아니었고, 수고비 명목으로 얼마든지 지출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쉬운 길을 포기했습니다.
떨어지면 떨어졌나보다 하고 다시 더 잘 준비해서 감사를 받았습니다.
결국 그 다음 해에는 5년짜리 인증을 받게 되었는데,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을 걸쳐 어렵게 (또는 정상적으로) 인증을 받고 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몇 번의 감사에 대비하느라 우리 학교의 교학의 질이 엄청 높아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학교의 인증 감사 과정을 통해 몽골 교육부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인증을 받고 나서야 알게 된 이야기인데,
감사관들이 학교를 둘러보고는 돌아가서 무기명 투표를 해서 최종 인증 여부를 가리는 시스템이었다고 합니다.
감사관들 모두는 객관적으로 우리 학교가 인증을 받을 수준이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기명 투표를 하면 불합격이라는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무기명 투표의 한심한 결과를 보고 그 위원회의 위원장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당신들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이 학교 인증받는게 맞다는거 다 알고 있지 않냐며,
담당관들을 다 갈아치워 버렸습니다.
그런 후에야 우리 학교가 인증을 통과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몽골 교육부의 어떤 부분을 정화하시기 위해 우리 학교를 사용하셨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우리는 우리 일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일을 통해 추가적으로 당신의 일을 하기 원하셨던 것이죠.
승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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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종류의 모든 승리를 위해,
바로 예수님이 그렇게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스스로 그 어떤 것도 주장할 수 없는 가장 지기 쉬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던 것입니다.
그 분이 져주셨기에,
우리도 져줄 수 있습니다.
그 분이 이기셨기에,
우리도 이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