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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의 훈련: 왜 광야인가?

박사과정 졸업을 하고나서 몽골로 들어가기 전 보스톤 생활을 정리하는 시기를 갖을 때였다.  케임브리지 연합 장로교회의 청년부에서 마지막 나눔의 시간을 가지며 내 8년간의 유학 생활 동안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간증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많은 하나님의 위로, 도우심, 은혜, 축복을 받았던 8년간의 삶을 반추해 보았다.  문득 나의 삶이 신앙의 선배들에게 동일하게 허락하신 광야 생활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유학이라는 기간은 광야 시기였다.  남들에게는 세계 최고의 명문 대학으로 일컬어지는 교육 기관에서 박사과정을 한다는 것이 부러움을 사는 영광스러운 기회로 비쳐질지 모른다.  유학 생활을 광야 시기로 간주하는 것은 너무 복에 겨운 소리가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선택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공에 대한 배경이나 소양이 일천한 상황에서 외국어로 수업 준비하고 토론하고 글을 써야 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나는 나의 학년 중에서 유일한 동아시아 출신의, 더듬거리는 영어를 구사하는, 가장 전공에 대한 기초 준비가 안되어 있는 학생이었다.  과연 내가 이 분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는 늘 자신없는 질문이었다.  당시로써는 늘 바닥에서 허덕인다는 것은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자존감에 대한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유학 생활 초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거듭된 싸인과 그로 인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전공을 바꾸어서 박사 과정 공부를 하는 것은 육체적으로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내 영혼도 육체도 쉽게 고갈되곤 했다.
유학생활 1년을 마칠 무렵, 스쳐 지나가는  자동차를 보며, ‘저 자동차에 치어서 내가 병원에 눕게 되면 합법적으로 쉴 수 있을텐데’하는 마음도 들 때도 있었다.  전공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박사 과정생으로써 매일 잠에 쫓기면서 소화해야 했던 엄청난 양의 학업량을 쫒아가야 했던 것은 하루하루 가시밭을 걷는 것과도 같았다.  
수요일이면 집근처의 한인 교회에서 찬양 예배를 드렸는데, 찬양을 하며 목놓아 울곤 했다.  돌아보건대 이 기간을 통해서 나의 숨어있는 성취욕, 세상을 향한 야심이 만져시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는 하지만 하나님 것과 내 것이 뒤섞여 있는 것들에 대해 고난을 통해 정제되어 갔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성장하기 위한 열망이 자라갔다.

이 무렵 함께 유학하던 교회 교우분이 질문을 했다.  

“다윗은 오랜 기간을 당시 국가의 최고 지도자에게 쫒겨가서 광야에 머물며 지냈지요.  그것도 그 기간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젊은 날을 그렇게 보냈지요.  과연 우리에게 그러한 고난 후에 왕위를 준다고 약속한들 그 고난의 길을 쉽게 갈 수 있을까요?”

실은 어려운 질문이었다.  꼭 나의 상황과 같았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비록 앞으로 이 고생에 대한 보상으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는다고 한들 지금 나의 고난에 무슨 위로가 될 것인가?”

그 무렵 성경을 읽으며 “광야”에 대해 묵상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고 그 가문을 이룰 자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래, 하나님은 당신이 쓰시기로 작정한 모든 인물들을 광야로 몰아가셨다.  그곳에서 그들을 만나주셨고 그곳에서 그들을 훈련시키셨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야 지역의 비옥한 농경 지대를 뒤로 하고 광야로 뜯어져 나와서 그곳을 밟으며 방랑했다.  그는 복의 근원으로 불리었는데 그가 가야할 곳은 복없는 광야 땅이었다.  그곳에서 방랑하며 하나님을 경험하며 그렇게 그 땅에서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았다.  그 땅을 전부 하나님이 주셨건만 그의 거처는 조그마한 이동식 천막이 전부였다.  

이삭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광야에서 천막치고 살았다.  심지어는 우물을 두고 갈등이 빚어질 때마다 자기가 판 우물을 버려두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야 했다.  

야곱도 외삼촌 댁에서 진한 타향살이를 경험했다.  야곱은 비록 축복권을 소유했지만 그가 말년에 이집트의 파라오를 만났을 때 고백한 바로는 “험한 세월”을 살았다.  야곱이 소유한 축복은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험한” 광야 세월을 통해서 이루어져 가는 것이었다.  에서는 광야를 경험하지 않고 아버지가 살던 그 지역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결과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의 라인에서 제외되었고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대적하게 되었다.  

요셉도 타향에 노예로 팔려가 그곳에서 살다가 그곳에 뼈를 묻었다.  비록 이집트 땅은 농경지대였지만 그의 타향살이는 아브라함의 떠나는 삶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모세도 이집트의 궁전을 나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생활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나와 광야에서 떠돌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다윗은 비록 사무엘을 통해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그 결과로 사울의 시기와 질시를 받아 광야 도피 생활이 시작되었다.  사울은 광야를 거치지 않고 왕위에 오른 사람이었다.  결국 그는 실패하고 말았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체험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두번째 왕 다윗은 광야를 거치며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었음을 우리는 그의 시편 고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엘리야도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기 위해서는 40일간의광야길을 걸어야 했다.   다니엘과 그 외의 많은 선지자들이 타국에서 거하며 나그네와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다.  

예수님도 사역을 시작하기 전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광야에 머물며 금식하고 사탄의 시험을 받았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그 분은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나그네의 삶을 사셔야 했다.

성서에서 제시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광야의 하나님, 나그네의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단련받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나안 농경 지대에 들어갔을 때 그들이 믿고 있던 풍요의 신에 대해 철저히 배격할 것을 명하셨다.  당시 농경지대에서 추구하던 신상은 풍요, 다산, 비, 물질, 음란 등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고난 속에서 만난 하나님과는 다른 이미지였다.  따라서 가난하고 가진 것 없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으로 비쳐질 수 있던 신관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고난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세상과 분리되어 옛 자아가 죽고 하나님의 빛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상과의 마찰이 빚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가 11장에서 기술했듯이 이 땅에 대해서는 나그네였고 이방인이었다.  

나의 미국에서의 삶 역시 광야의 삶처럼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환경에 이끌려 주거지를 옮겨야 했다.  우리 부부는 처음에는 대학 내의 스튜디오에서 지냈다.  장학 재단에서 받는 생활비는 물가 비싼 보스톤에서 기숙사 생활하는 학생 개인에게 꼭 필요한 정도의 비용을 충당하기에도 버거웠다.  우리 부부에게는 늘 수입의 1.5배가 고정적으로 필요했다.  

일년 후 미국 교회에서 알게 된 브라질 할머니께서 우리 부부를 보고 마음이 움직여 교외에 위치한 자택의 방을 하나 내 줄 테니 와서 지내라고 했다.  그리고 렌트비를 모아서 차를 사서 통학하라고 하셨다.  나와 아내는 차를 사서 그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분의 마음이 곧 바뀌어서 4개월 뒤 우리에게 나가달라고 하셨다.  다른 집을 구할 시간도 돈도 없었던 우리는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기도했다.  

마침 이디오피아 출신의 교회 친구 한 명이 값싼 방 두 개짜리 아파트가 있으니 작은 방 하나를 사용하고 공동으로 아파트 렌트비를 내도록 배려해 주었다.  한 동안 이렇게 떠돌이 생활을 했다.  어떤 여름에는 여섯 번 거처를 옮겨야 되는 상황도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잘 집이 없어서 밖에서 지내지 않아도 되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배려해 주셨다.  

이렇게 떠돌이를 하는 기간 나그네된 삶에 대해서 묵상했다.  크리스챤은 하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지만 이 세상 가운데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이방인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가지고 그것을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미국에서의 나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미국에 살지만 미국 시민권자는 아니었다.  내가 사는 집은 잠시 월세를 내고 이용하는 것이고 본디 내 것이 아니다.  나가달라고 할 때는 나가야 하는 것이다.  마치 아브라함이 광야를 유랑했던 것 같이…  단 우리는 이방인이지만 축복의 통로로 사용되기 위해서 그 땅에 부르심을 입은 것이다.  우리가 복의 근원이 되어 그 땅에서 복을 끼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나는 미국을 떠나기 전 케임브리지 연합 장로 교회 청년부와의 나눔을 준비하면서 내가 누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진 축복은 광야 시절 나그네 삶을 사는 자에게 만나주시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떠올렸다.  이 광야 시기 동안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계시해 주시기 위해 내게 훈련과정을 주셨는데 그것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었다.  

첫째는 하나님께 미래를 맡기는 훈련이다.  둘째는 하나님께 물질적 공급을 의탁하는 훈련, 셋째는 건강과 생명의 안전을 하나님께 내어맡기는 훈련, 넷째는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내려놓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내가 유학 생활이라는 광야 길 가운데 받은 하나님의 네가지 훈련에 대해서 나누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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